구글 풍후 애드센스


왕검성의 위치를 드디어 찾아냈다. 모두 주목!!! by 창조양자역학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절대 평양도, 요동도, 요서도 아니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절대 평양도, 요동도, 요서도 아니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절대 평양도, 요동도, 요서도 아니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절대 평양도, 요동도, 요서도 아니다.

 





 


* 주의사항: 이 글의 저작자는 저이며 이 글에서 말하는 주장은 저의 뇌에서 나온겁니다. 그니까 여러분들이 했다고 거짓말치거나
논문에 멋대로 인용하지마세요. 인용할려면 출처 밝히세요. 








오늘날 한국사학계나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논쟁 행태를 보면 항상 똑같다.
맨날 똑같아. 짜증나..... ㅡㅡ.....;;;;

 






(맨날 쏟아져나오는 논문~ 논문~~~ 하지만 위만조선 수도의 존재를 지금도 규명못해~ ㅡ.ㅡ)








도대체 왜 왕검성의 위치를 아직까지 못찾는거야? 다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있다구.

 





(강단사학계 & 이글루 역밸 매식자와 재야사학계가 각각 주장하는 왕검성 위치)



먼저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매식자 너부터 오류를 집어줄텐데.




첫번째 핵심과 두번째 핵심을 말해서 이글루스 역밸의 매식자 주장의 근거를 아예 없애버린다.




먼저 첫번째 핵심!




왕검성의 기초 사료인 사기 조선 열전에는 왕검성이 낙랑군의 수부인 조선현(평양)에 있었다는
언급이 없어.

후한 때까지만 해도 응소는 왕검성의 수도를 요동군 험독현이라 봤지. 평양이라 보지않았어.
그러나 응소의 주석을 봄 응소의 후대 사람인 '신찬'은 이에 반대하여 사기는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패수는 낙랑군에 있잖아? 응소는 틀렸어! 라고 주석을 달았고
서기 7세기 당나라 시대 초기 학자 안사고도 이에 찬성했다.


당나라 초기의 지리지인 괄지지括地志에선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 = 낙랑군의 왕검성 = 조선 수도
라고 적고 있다.


즉 이건 낙랑군 조선현이 왕검성이란 인식은 신찬 이전에는 없었다는 것이 된다.






(후한대까지만 해도 낙랑군 조선현이 왕검성이란 인식은 없었다.)




                                                              (정신이 멍해지는 매식자의 뇌)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 낙랑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원전 108년 이전 낙랑에 대한건 오직 후한서에 딱 한번 나온다.

그게 다음의 기록인데.

후한서를 보면 기원전 177년 당시 낙랑에 대해 나오지만 조선이라는 구체적
중심지가 있었다는 언급은 없고 단지 산동의 왕씨 가문이 낙랑의 산골로 도피해서 그 곳에서 여차저차
성장했다. 라고 나올 뿐이다.  '조선으로 망명했다.'라는 말이 없는 걸로 봐서 당시 낙랑은 조선의
중심지는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오히려 평양 지역에는 '조선'이란 중심지 나라가 아닌 조선에 속한 낙랑이란 나라 혹은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마천도, 한서 조선전,한서 지리지,후한서,삼국지의 어느 저자도 낙랑군의 조선현이
왕검성이란 인식은 하지않고있었다는 것이다.





                                                (왕검성=낙랑군 설이 발리자 절망하는 매식자)





이게 첫번째 핵심이다. 근데 여기서부터 지명 논쟁으로 들어가면 매식자,재야사학도가 너나 나나 지명 논쟁으로
지도 게임을 벌여대서 너무 번잡해지고 복잡해져 머리아프다.

 


자, 이제 두번째 핵심이다. 왕검성의 수도는? 유물은? 유적은? 하나도 안나왔다.

이런데도 왕검성이 평양에 있다는건 억지지. "아직 수도가 안 나온 것 뿐이잖아."라고 말할까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경우는 어떨가. [사기],[한서] 등에 위만조선은 무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한 제국의 무력에 맞서 1년여 동안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기반을 갖춘
국가체로 묘사되어있다. 정황으로는 발달된 철기 문화를 영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서북한 지역에서는 앞서 문헌에서 보여주는 위만조선의 실체를 웅변할만한 대규모 유적이
조사된 예는 없다."
-4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기원전 300년을 전후해 연나라 진개가 요하를 넘어 고조선을 침범한 후 연나라와 만번한(요하 부근)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잡으면서 요하 ~ 청천강 이북은 연나라계의 연화보 -세죽리 유형 문화가 쫙
깔려있고 청천강 이남으론 세형동검 문화가 발달한다.







"세죽리-연화보 유형에서는 철제 농기구 및 병기가 많이 제작되고,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견되며
무엇보다도 세형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도 바로 전시기인 기원전 5~4세기에서는
윤가촌 등에서 세형동검이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의 영향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세형동검이 발달되어서 남한의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펼쳐지고
토광묘가 발달한다. 그러나 세죽리-연화보와는 달리 명도전이 발견되지 않으며.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분명 [사기],[한서]의 기록은 기원전 196년~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5천 기마대를 보유하고있고
한나라와 1년 동안 전쟁을 할 수 있고, 한나라의 5만 대군에도 쉽게 함락되지않는 왕검성이란 강력한
성이 있었다.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도 한나라의 공격이 아닌 내분에 있었다.




(한무제 당시 강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한나라와 1년 동안 싸웠는데도 멸망 원인이 내분이었
다는건 위만조선이 강력한 정복국가의 성격을 지녔고 한나라에 대항할만한 철제무기로 무장했다는걸 의미한다.)


위만조선이 조선,진번,예맥,임둔 등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영토 수천리를 보유했다는건
'정복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며 이런 정복력의 원동력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요동군의 후원을
받아 한나라의 발달된 철기도 많이 공급받았다는 것에서 나온거다.


그런데 청천강 이남에선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까지는 청동기가 주류이지. 철기는 소수에
불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에야 청천강 이남에선 한나라의 철기가 청동기를 '조금' 대체하기 시작한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점들은 위만조선의 수도가 청천강 이남에 있을 수가 없다는 고고학적인 결정적 증거이다.

만약 위만조선의 수도가 청천강 이남에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다른 차원에 있거나 혹은 유령들일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단계가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 고조선 이래의
문화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 당시 지배 세력의 주 묘제는 여전히 세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54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이에도 불과하고 후한 이후의 신찬과 당나라의 안사고,훨씬 후대 당나라 괄지지의 상상에 의한
왕검성=평양 설을 신봉하는 한국 역사학계는 고조선사 연구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이걸로 왕검성 = 평양 = 낙랑군 설 종말)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먼저 위만조선의 국가적인 성격 자체는 문헌을 통해 볼 때
연나라계의 이주민 집단과 조선 토착집단으로 이루어져있고
이주민 집단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조선 토착집단을 '무력'을 통한 쿠데타로 일방적으로 정복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듯

요하 동쪽~청천강의 사이에 있는 연나라계 세죽리-연화보 유형 문화 어딘가에 위만 세력의 중심지가
있고


청천강 이남의 세형동검문화는 단지 위만 세력에게 정복당한 조선 토착집단에 불과하고
위만 세력의 중심지로 쓰이지도않았다.

 






문헌에서 파악된 다음 사항들은 연나라계 세죽리 연화보 유형 = 위만 세력이란걸 증명해준다.




1.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2. 위만은 조선 왕 '준'으로부터 많은 연나라계 이주민이 거주하는 조선의 서쪽 100리의
빈 땅을 하사받는다.

 

그렇다면 왕검성의 위치는 청천강 이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요동일까? 요서일까?






재야사학도들은 밑의 지도들에서 보이듯 왕검성의 위치를 요동군 험독현이나 요서에 두고싶어한다.



재야사학도들은 밑의 지도들에서 보이듯 왕검성의 위치를 요동군 험독현이나 요서에 두고싶어한다.




재야사학도들은 밑의 지도들에서 보이듯 왕검성의 위치를 요동군 험독현이나 요서에 두고싶어한다.












(출처: www.coo2.net)






(출처: KBS 역사스폐셜 '비밀의 왕국 고조선')



                                                                      (뭐야? 이 지도는?)




재야사학 전체는 모두 요동군 험독현이나 요서 지역에 왕검성의 위치를 두고싶어한다.

절대 평양에 두긴 싫어한다.



1. 하지만 위만이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요동군의 후원을 받은걸로 볼 때 그가 요동군의 땅 험독현에
수도를 두었을리도 만무하다.


2.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요동군 바로 코 앞에 수도를 두고 1년 동안 싸운다는 것도 문제.

3. [사기],[한서] 어디에도 그가 조선,진번,예맥을 정복했다라고 나오지. 요동,요서에 그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언급은 없다.


4. 위만조선이 망한 후 한나라가 한사군(진번,임둔,낙랑,현도)을 설치하였지만 요동군의 영역을
확장시켜 왕검성을 요동군의 관할하에 넣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요동,요서에는 왕검성의 수도가 있을 수 없다.






                                        (재야사학도들: 그럼 왕검성이 어디라는거야?)




대충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글루스 역밸의 매식자들은 다시 낙랑군=평양 설 밖에 있을 수 없고
단지 수도가 발견되지않았을 뿐이라고 억지 우기기만 해댄다.




                               (그 말은 생각을 더이상 안해보겠다는 것인데....?)












재야사학도와 강단사학 & 매식자들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며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루한 소모전만 반복하고있다.







                                           (그럼 대체 왕검성은 어디지?)



 

의외로 이 문제의 해결점은 간단했다.  요동,요서,청천강 이남만 땅인가? 왜 다른 땅에 눈을 두지
않는단 말인가?










 

위만조선이 망한 후 그 땅은 한사군으로 갈렸다, 진번,임둔,낙랑,현도다.






진번,낙랑은 청천강 이남이니 제외시키고 임둔은 황해도인데. 한나라가 '창해군'을 설치하려다 실패했다는
중국쪽 기록으로 볼 때 이곳은 절대 왕검성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셋을 다 치워버리면 현도만 남는다.


그렇다!  현도가 왕검성이었던 것이다!!!!!!!!!!!!!!
(여기서의 현도는 제1차 초기 현도군 즉 주몽이 도읍한 오녀산성 일대의 환인시(桓仁市)를 말한다.)












 응소가 왕검성을 '험독'이라 불렀듯 현도와 험독은 발음이 유사하다.












근데 왜 중국 기록엔 현도가 왕검성이란 기록이 없을까?


간단하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왕조의 공식적인 역사책이 아니고 사마천 개인이 저술한 것이기에
개인이 '조선 열전'을 적을 때 기록의 전문성이 적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로 사마천은 한사군의 이름 조차 적지않을 정도로 기록에 있어 태도가 불성실했다.





                                                   (한무제에 의해 고자가 된 사마천.)

이후 한서의 조선열전은 거의 사마천의 기록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후한의 응소 때까지만 해도
왕검성이 어디에 있었다는 정확한 인식이 없이 오직 응소만 요동군 험독현에 왕검성이 있다라 할 정도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불분명했다.



그 원인은 사기나 한서의 조선열전의 말미에서 한무제가 조선 정벌에 나선 한나라 장군들이 귀환하자
참수하거나 유배보냈다하고 사마천도 조선 정벌 전쟁은 한나라,조선 양국에게 있어 피해만 있고 득은 없었다라는
식의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

=====================================================================================================

=====================================================================================================

=====================================================================================================



 

자자, 현도군을 살펴봄으로써 위만조선 수도가 어떻게 현도에 있었다는건지 알아보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 중의 하나인 현도군이 이후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자.


[후한서]나 [삼국지]의 동이전을 통해 보면
기원전 82년에 토착민의 저항으로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된다. 임둔군의 소속 현들이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토착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현도군도 기원전 75년에 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현도군의 본래 소속 현들과 옛 임둔군 소속 현들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현도군이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패퇴하여 쫓겨가는 이 모습은 현도군이 위만조선의 수도였기에
당연한 것이다.

위만조선이 내분으로 인해 무너졌을 정도로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완벽히 이기지못했다.
즉 한나라로선 위만조선 중심지의 토착민의 저항을 받는건 필연적인 것이었다.
 

반면 낙랑군에서는 조선인의 반발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108년~기원전 20~30년대까지 전혀 보이지않는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사항이다.

 









그 토착민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중국 기록들은 그 세력의 실체를 '고구려'라 밝히고 있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하였고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


"한나라 때에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삼국지 고구려전





          (뭐야?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야할 고구려가 왜 기원전 108년에 있어???????!!!!!!!!!!!!!!!!!!!!!)



=========================================================================================================
========================================================================================================

윗 기록의 일련의 정황은 위만조선 멸망 후 위만조선의 공백을 메우기위해 일어난 '고구려'라는 새로운
집단에 대한 기록이다.

한무제의 위만조선 정벌 전쟁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한무제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선
한나라 장군들이 개선하자 그들의 목을 베거나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한무제는 고구려 집단을 회유하고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왕검성에 세워져있던 현도군은 파괴되고 쫓겨가게된다.

 

=========================================================================================================
========================================================================================================









사기,한서 조선열전은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패수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였다고한다.

과연 이 패수가 어디인가? 청천강 이남을 위만조선 중심지로 볼 시 청천강이나 대동강이 되지만 이제 그건
개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요하인가? 요하의 지류가 되는 뭐 작은 강들인가? 그건 절대 안된다. 거긴 요동군의 관할 구역이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답은 현도군의 근처에 있는 어느 강이 바로 패수였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의 묘지명에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나라를 열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바로 주몽이 도읍했던 졸본 즉 오녀산성이나 혹은 그 근처에 난공불락의 수도 왕검성이 있던 것이다.


이 패수는 바로 오녀산성 근처의 혼하의 지류 '부이'강이다. 

 











                       (뭐...뭐야? 졸본(오녀산성) 근처에 왕검성이 있다고??????!!!!!!!!!!!!!!!!!!!!!!!!!)






                                                       (졸본(오녀산성)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주몽의 첫 도읍지, 졸본(오녀산성).  기록상의 왕검성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사기],[한서]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 우거왕이 한나라와 싸울 때 '험준한 곳'에서 싸웠다고 한다. 또 왕검성은 험준한 곳에 있어
1년 동안 한나라 5만대군이 포위해도 함락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주몽이 송양왕의 비류국을 정복한 후 그 곳을 다물도(多物都)라 이름지은거나, 다물이 옛 땅을 되찾았다는
뜻의 고구려 옛 말이라는 것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2년)
주몽이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 일대를 되찾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세히 한자를 음미해보면 다물도(多物都)는 "도읍을 되찾았다."란 뜻이 된다. (왕검성을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적인 증거를 대자면 제1차 현도군이 있던 환인시 일대에는 위만조선의 시기인
기원전 2세기경. 즉 고구려가 있기도 전에 이미 적석총이 조영되고 있었다.

적석총이 조영되고있었다는 건 이 지역에 어떤 왕권이 생겼을 가능성을 내포하고있다.

즉 이 곳이 위만조선의 중심지였다는 또 다른 증거다.




(기원전 2세기 위만조선 당시부터 분포하는 적석총 무덤떼)


기록을 하나 더 제시한다.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의 관구검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당해
수도 환도성이 불타자 수도를 새로이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적는데. 이 평양성은 선인 왕검의 터라고
나온다.


'평양'이란 말 자체는 당시에 고구려에서 쓰였는지 안쓰였는지는 몰라도 이 평양은 확실히
우리가 아는 그 평양은 아니다. 당시에 낙랑군이 여전히 북한의 평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이 새로 도읍한 '선인 왕검의 터(평양성)'는 환도성 인근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고구려 졸본이나 환도의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조선'이란 기록이 나온다. 즉 낙랑을 '낙랑조선'이라 불렀다는 것이며
한서 식화지와 사기 흉노전에는 "예맥조선'이란 표기가 나온다. 당시 위만조선은 예맥조선이라 불린 것이다.


즉 적석총을 조영하는 예맥족의 수장 위만이 다스린 국가가 바로 예맥조선이다.



武帝...彭吳穿 穢貊朝鮮,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漢書/志/卷二十四下 食貨志第四下
무제 때 팽오가 예맥조선으로 통하는 길을 개통하고 창해군을 두었다. 연(燕)과 제(齊)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한서 지 권이십사 하 식화지 제4하


흉노는 동쪽으로  예맥조선과 접하였다.(東接穢貊朝鮮) -사기 흉노전


"낙랑조선 사람들은 법금팔조를 지킨다....."(한서지리지)






이렇게해서 복원해낸 우리의 위만조선의 강역도를 보자!










                      이글루스 역밸러 '황룡' 제작 http://dragonfear.egloos.com/














 


              (재야사학도: 고조선의 부활이 고구려라는거군요. 아, 너무 위대하고 알흠답네요. 감사합니다.) 




               (강단사학자 & 매식자들: 뭐야...? 이렇게 답이 쉬웠어? 그럼 우리들은 지금까지 뭐해온거지?)



고구려 종족과 위만조선의 왕족 위씨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곧바로 고구려와 맞닥뜨려 고구려를 포섭하려고하는 모습은
고구려의 어떤 중요한 역할을 암시하고있다.

기록에는 위만조선의 위씨 왕족의 왕비 가문이 어떠했는지 나오진않는다.

위만조선의 주요 신하들은 왕자 장長,장군 성기,한음,왕협,노인 최,역계경만 보일 뿐이다.
왕비 종족의 존재는 등장하지않는다.

기록을 통해 유추해보자.

 

유리왕 때 새로 도읍하였다는 '위나암성'이  '위나의 바위 성'이란 뜻으로
우리가 보통 아는 고구려의 5부족인 소노부,절노부,순누부,관노부,계루부 외에
(삼국사기에선 '노'가 '나'로 나온다.)

또 다른 '위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건 위나암성이 위만조선의 위씨 왕족과 모종의 연관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소노부(비류부)가 왕국을 이루고 살다가 주몽에게 발리고 주몽이 '다물'을 선포한 걸로
추론해보면 당시 그럴만한 상황은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쳐발려 서북방으로 이동 때와 연결된다.


고로 소노부는 한나라 현도군의 체제 아래서 호의호식하고 잘 산 민족반역자라고 본다면
고구려의 5부족 중 한 부가 바로 위만조선의 왕비 종족이 된다.


고구려는 고구려 태조왕 대에 계루부로 왕권이 교체되기까지 소노부가 왕권을 잡았고
소노부가 왕권을 잡고있을 때는 한나라에 크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나 계루부가 오르며
한나라에 완전 적대를 하게된다. (고구려의 태조왕,신대왕)
계루부가 대두됐을 때 왕비 종족은 절노부가 되었고 계루부와 절노부는 서로 혼인 동맹적,친밀한 관계였다.


절노부는 삼국사기에선 '연나부'라 불리고 있다. 연나부(절노부)의 모계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계루부의 왕자들은 '연우(산상왕의 이름)'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듯 '연'이란 돌림자를 쓰고있다.

 

서기 169년 혹은 184년경에 '연인然人'이란 관직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것을 감안할 때
연나부는 어떤 '연'이란 종족과 관련이 있는 걸로 추측된다.


연나부의 성은 '우優'씨인데. 이는 때에 따라서는 '위'라고 발음되기도한다.

 
왜 그러냐면 연나부의 성은 '우씨'
이 우씨는 기록에 따라서 우태,위구태,위궁 등의 부여,고구려 왕족 이름의 사례로 볼 때 위씨 왕족을 뜻하며
위만조선의 위씨 왕족에서 고구려 5부족에서 '연나부'라는 강력한 부족이자 왕비 부족으로 잔존했음을 의미한다.


소노부완 달리 한나라에 거세게 저항하며 한나라에 강한 적대 의식을 드러낸 계루부,그리고 계루부의
혼인동맹종족 연나부. 연나부의 성은 위씨...!

이것은 연나라인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침입에 멸망했고 위만조선의 왕족인 연나라 위씨가
연나부로 생존했고 계루부는 위씨 일족과 깊은 연관을 맺어 한나라에 저항 의식을 가지고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계루부도 연나라와 관련될 수 있다. 연나라의 마지막 도읍이 '계'성이었기 때문이다.


산해경에 "연나라의 남쪽에 개국盖國이 있다."라고 한걸로 보면 중국 요서 지방에 '개'라고 불리는
어떤 부족 국가가 있었고 연나라와 연관을 맺었는데. 그들이 후에 위만과 함께 조선으로
이동해와서 위만조선을 세웠다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 글쓰고나서 나중에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2007년에 나와 같은 설을 주장한
조범종이란 교수 분이 있더라.
http://www.ppyoo.com/db/bbs/board.php?bo_table=essay&wr_id=27


대단한 분이군.

 


근데 조범종 교수의 주장은 단군조선 부정론자 송호정에게 씹혔다.  송호정 왈 "한서 제후연표 보고 깝치지마시고 정사좀 보시죠?"
조범종 교수는 한서 제후연표를 근거로 기원전 107년 어쩌구 저쩌구 이러구 저쩌구로 현도가 왕검성이라고 주장했는데.
고고학적 근거는 제시못한걸로 알고있음.


 


요약:

1.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청천강 이남에 있을 수 없다.
청천강 이남은 세형동검 문화로 사료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철제무기에 기반한 정복국가의 성격과 도무지 맞지않으며
왕검성의 유물,유적이 전혀 지금까지도 확인되지않았기 때문이다.


2. 왕검성은 요동이나 요서에 존재할 수 없다. 위만이 요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사료 어디에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3.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위만조선의 영토는 4개로 분할되어 진번,임둔,낙랑,현도가 되었다.
위만조선의 수도는 청천강 이남인 진번,임둔,낙랑이 될 수 없다. 오직 현도만이 왕검성의 후보지가 된다.


4. 위만조선 멸망 직후 고구려라는 새로운 세력이 현도(왕검성) 일대에 등장해 한무제가 고구려를
포섭하고 회유하려하지만 실패한다. 한무제가 위만조선 정벌에 참여한 장군들의 목을 베거나 귀양보낸 이유는
위만조선 중심지의 확고한 지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5. [사기],[한서],[위략]은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상하장에 머물러 세력을 키운 후 왕검에
도읍했다고한다.
'연남산묘지명'은 주몽이 도읍한 오녀산성 근처의 비류수를 '패수'라 부르고 있다.
고로 왕검성은 길림성 환인시 혼하의 지류 부이강(비류수)에서 찾아야한다.

6.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은 비류수 일대를 정복한 후 그 곳을 '다물도(多物都)'라 불렀다고한다.
고구려 옛말로 '다물'은 옛 땅을 되찾았다는 말이며 도都는 도읍 도都이다. 즉 조선의 왕검성 도읍을 되찾았다는
뜻이 된다.

7.  환인시 일대에는 위만조선의 시기인 기원전 2세기경. 즉 고구려가 있기도 전에 이미 적석총이 조영되고 있었다.
이 곳이야말로 위만조선이라는 강력한 정복국가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할만한 유일한 후보지다.

8.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의 관구검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당해
수도 환도성이 불타자 수도를 새로이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적는데. 이 평양성은 선인 왕검의 터라고
나온다.   동천왕이 새로 도읍한 '선인 왕검의 터(평양성)'는 환도성 인근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야말로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고구려 졸본이나 환도의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9. 고구려의 연나부,계루부는 위만의 '연나라 혈통'과 관련이 있는 집단이며 특히 연나부의 성은 '우씨'
이 우씨는 기록에 따라서 우태,위구태,위궁의 부여,고구려 왕족 이름의 사례로 볼 때 위씨 왕족을 뜻하며
위만조선의 위씨 왕족에서 고구려 5부족에서 '연나부'라는 강력한 부족이자 왕비 부족으로 잔존했음을 의미한다.





 














 


덧글

  • 아무것도없어서죄송 2012/03/22 21:47 # 답글

    재야사학이든 뭐든 제 댓글 달린 게시물은 왜 지우셨습니까?
    님말따라 심리학으로 조상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면 고생물학자들은
    죄다 화가하지 왜 화석을 찾는거냐고 질문했었습니다.
    창조님께서 답변을 다셨기에 확인해볼려고 갔더니 게시물이 삭제됬더군요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55 #

    댓글이 싫어서 지운게아니구요. 그 댓글에 답변달았습니다. 다만 그 글을 역밸에 올렸는데.
    필요없는 글이라서 지운겁니다. 오해말기바랍니다.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55 #

    제가 언제 고생물학자보고 화석찾지말라고 말이나 했습니까?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56 #

    남이 하지않은 소리는 알아서하는 천재시네요. 님짱먹으셈.
  • 아무것도없어서죄송 2012/03/23 04:40 #

    저는 님이 심리학적으로 무지 오래된 단군 복식과 얼굴을 때려맞출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비꼰겁니다만?
    심리학적으로 그럴 수 있다면 왜 그게 인간에게만 해당됩니까? 인간도 단세포생물로부터 진화할 거일텐데.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4:50 #

    단군초상화와 홍산문명 최고 통치자 머리는 비슷한건 맞잖습니까.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4:51 #

    심리학이란건 제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말한거구요, 전승의 가능성도 포함시켜야겠죠~
  • ㅇㅇ 2012/03/22 23:34 # 삭제 답글

    왕검성 곰들은 개발 달고 다닌다죠..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56 #

    ?
  • 황룡 2012/03/23 05:50 # 답글

    좋은 글이네 근데 왜들 이러시지? 색안경만 보지말고 객관적으로 보세요. 진짜 의미있는 글임
    난 재밌게 읽었음 ㅇ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6:54 #

    오오오오.....,
  • 황룡 2012/03/23 05:51 # 답글

    논리와 추론이 완전 김용만이 주장하는 설보다 더 설득력있고 타당하구만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6:54 #

    고맙습니다. 허허헛!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