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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이 낙랑군에 있을 수 없다는 결정적 증거 by 창조양자역학

왕검성이 낙랑군에 있을 수 없다는 결정적 증거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경우는 어떨가. [사기],[한서] 등에 위만조선은 무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한 제국의 무력에 맞서 1년여 동안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기반을 갖춘
국가체로 묘사되어있다. 정황으로는 발달된 철기 문화를 영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서북한 지역에서는 앞서 문헌에서 보여주는 위만조선의 실체를 웅변할만한 대규모 유적이
조사된 예는 없다."
-4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세죽리-연화보 유형에서는 철제 농기구 및 병기가 많이 제작되고,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견되며
무엇보다도 세형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도 바로 전시기인 기원전 5~4세기에서는
윤가촌 등에서 세형동검이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의 영향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세형동검이 발달되어서 남한의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펼쳐지고
토광묘가 발달한다. 그러나 세죽리-연화보와는 달리 명도전이 발견되지 않으며.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단계가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 고조선 이래의
문화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 당시 지배 세력의 주 묘제는 여전히 세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54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분명 [사기],[한서]의 기록은 기원전 196년~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5천 기마대를 보유하고있고
한나라와 1년 동안 전쟁을 할 수 있고, 한나라의 5만 대군에도 쉽게 함락되지않는 왕검성이란 강력한
성이 있었다.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도 한나라의 공격이 아닌 내분에 있었다.

위만조선이 조선,진번,예맥,임둔 등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영토 수천리를 보유했다는건
'정복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며 이런 정복력의 원동력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요동군의 후원을
받아 한나라의 발달된 철기도 많이 공급받았다는 것에서 나온거다.


그런데 청천강 이남에선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까지는 청동기가 주류이지. 철기는 소수에
불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인 기원전 1세기 시점에서야 청천강 이남에선 목곽묘가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한나라의 철기가 청동기를 '조금' 대체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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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이남(낙랑군 지역) 무덤 양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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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 세문경,과 출토,수레 부속은 안 나옴(기원전 2세기 토광묘)

2단계 - 마구,수레부속 출토,세문경,과는 보이지 않음

3단계 - 기원전 1세기 시점이다. 낙랑군 설치 이후인데. 목곽묘가 사용되며 청동기,철기가 비슷한 비율로 발견됨.

4단계 - 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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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설치 이후 목곽묘-기원전 1세기(목곽묘는 묘제의 형식상 토광묘에서 한단계 진전된 형식이며
부장품 면에서도 1식 세형동검보다 늦은 2식 세형동검이 부장되고 일부 세형동검이 철제단검으로 변화되어
부장되기도한다. 강철제작기술의 확산 속에서 철제무기와 공구의 부장이 늘어나는 동시에 종류도 다양해지며
거마구의 부장도 보편화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라는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으며 앞시기 세형동검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51p)


"기원전 1세기 대 목곽묘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목곽묘(기원전 2세기의 토광묘와 기원전 1세기 목곽묘 두 개가
있는데. 기원전 1세기의 목곽묘 중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목곽묘
기원전 2세기의 토광묘의 유물 조합과 상당히 유사한데.
철기의 수량이 한 두점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는(청동기가 다수를 차지하고있다.) -세형동검,동모,동과,동촉 등...,"
(81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기원전 1세기 목곽묘(낙랑군 설치 이후)의 부장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철제무기,공구 및 거마구가 주종을
이룬다.
(...) 전체적 유물 양상이 고조선 이래의 재지적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고조선 토착 세력 무덤으로
판단."  


"군현 지배 초기의 목곽묘 단계에서는 고조선 이래 전통적인 한국식 동검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국랍중앙박물관 '낙랑' 도록)

"목곽묘의 조영자는 고조선 단계부터 서북한 각지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를 통할하던 지배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라는 정치적 사변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기반을 해체당하지않고 재지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군 치하인 기원전 1세기에도 여전히 위만조선의 재지적 기반을 유지한채 지배세력들이 존속되었음을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목곽묘라는 분묘의 문화 현상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8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요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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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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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로 청천강 이남(낙랑군 지역에서)에서 목곽묘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토광묘가
사라져감. 이 때부터 점차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기 시작하지만 세형동검문화라는 기본 틀 아래 부수적으로
포함되어 확산되어갔다.  
고로 기원전 196년에서 기원전 108년까지 거의 100여년 동안 수천리의 영토를 보유한
철제무기에 기반하고있고 한나라와 1년이나 겨룬 정복국가 위만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므로
청천강 이남에 위만조선의 중심지,수도는 있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청천강 이남의 기원전 2세기와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있던 중간 매개체로서의 목곽묘 조차
세형동검 등 청동기가 다수를 차지하여 부장품의 중심을 이루고있고 철기는 소수를 차지하고있다.
쉽게 말해 기원전 196년 - 기원전 108년 사이에 청천강 이남에는 한나라와 1년 동안 겨룰 정도의 강력한 국가는
있을 수가 없고 있다한다면 그건 유령이란 소리다.


뭐.., 백 가지 말도 최몽룡 교수의 한 마디로 요약가능하다.


"(청천강 이남은)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2. 기원전 1세기에 낙랑군이 설치되고 목곽묘가 본격 조영되지만 세형동검을 사용하기 고집하는
기존 토착세력(고조선계)의 지배가 무너지지않고 유지되었다.(낙랑군이 토착세력의 지배를 무시못함.)
이 지배세력들은 한나라의 우수한 철기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청동기 철기가 반, 반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 사실들은 이들이 기존의 문화를 반 정도 고집하고있었단 것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건


- [사기],[한서] 등에서 위만조선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왕검성 함락 이전 항복한 우거왕의 주요 신하들 모두가
기존의 자신들의 땅으로 못 가고 중국의 산동에 땅을 하사받고 나중에 대부분 제거를 당했다는 점은
즉 왕검성에 있던 기존의 대신,호족들은 한나라에 항복을 햇음에도 불구하고 물갈이를 당했으며
그들의 토착 영역에서의 지배를 한나라가 원치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의
목곽묘의 조영자들은 토착 지배를 인정받고 잘먹고 잘살고있다. 기록의 모습과 너무 다르므로 낙랑군 일대가
왕검성이 될 수 없다는 또 다른 증거다.


- 기원전 1세기 이후에야 청천강 이남에서 목곽묘가 주종을 이루고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지만 세형동검문화라는
기본 기조에는 변함이 없고 토착세력들이 자신의 문화를 여전히 고집을 하여 청동기 반,철기 반으로 한 것으로 볼 때
이 곳이 철제무기에 기반한 정복국가 위만조선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모순이 상당히 많다.




세형동검 문화를 여전히 유지하는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낙랑 사회는 기원전 1세기의
낙랑군 설치 이후에도 족장사회의 틀은 여전했다.
이런 이들에게서 위만조선 국가의 존재 가능성을 찾는 것 자체가 병신짓이다.







자.., 아무튼 왕검성에 위만이 도읍한 후 세력을 확장시켜 진번,임둔이 항복해왔다고 [사기],[한서]의 조선열전이 말하니까
낙랑,진번,임둔 모두가 왕검성의 후보지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마지막 최후로 남은 지역이 바로 현도군이다. 현도군이 왕검성인데.. 증거를 알고싶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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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질문인 2012/03/23 00:42 # 삭제 답글

    올려주신 지도를 보니 산동의 왕씨 호족들이 낙랑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하시는데 창조양자역학님께서는 그러면 낙랑군의 평양 설치를 매식자들처럼 한무제가 점령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들 왕씨 호족들이 이주해서 생긴 것으로 보시는지요?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47 #

    낙랑군은 한무제가 점령한건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진않았습니다.
    낙랑에서 군사충돌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없고 오히려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낙랑의 토착세력들을
    반발하지않고 한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오히려 토착세력의 지배도 한나라가 인정해주었습니다.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48 #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 이후 토착세력의 청동기 반 철기 반의 목곽묘 시대가 지나간 후 기원전 1세기 후반이 되면 귀틀무덤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귀틀무덤의 조영자들의 정체는 그 귀틀무덤에서 출토된 죽간들에 왕씨라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서에는 이들이 왕조,왕굉 등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0:49 #

    후한서에 보면 산동 왕씨가 기원전 177년에 산동에서 배를 타고 낙랑의 산골로 이주했다고나옵니다.

    당시 낙랑은 몇몇 토착세력들이 청동기를 가지고 지배를 하는 즉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였는데.
    왕씨 호족들이 가면서 그 지역을 점차 주도해가기 시작하는겁니다.
  • 질문인 2012/03/23 01:00 # 삭제

    그렇다면 낙랑군은 한무제가 점령하기는 했는데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이주한 중국측 왕씨 호족들 주도하에 이른바 한나라와의 협상을 통해서 한나라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측 입장에서보면 이른바 일종의 내부 쿠데타같은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1:01 #

    왕씨 호족과 낙랑 토착세력이 짝짜꿍먹고 한나라 군사 입성을 환영한 것 같습니다.
  • 질문인 2012/03/23 01:04 # 삭제

    어쨌든 한무제의 군사적 점령이라는 매식자들의 주장과는 다르시군요.
    잘알겠습니다.
    그리고 왕검성이 평양이라는 소리는 말도 안되는 소리죠.
    글 잘보았습니다.
  • 창조양자역학 2012/03/23 01:07 #

    감사합니다. ^^ 근데 한무제가 점령한건맞습니다. 사기,한서,위략에 한무제의 장군 누선의 수군이 산동에서 출발하였다고하니 누선의 수군이 낙랑의 평정에 일조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군사적 점령이 아니냐 맞냐는 논의대상이 안됩니다.

    어찌됏든 '점령'하게된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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