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헌원과 염제신농이 융합하여 신시(神市)를 이루다.
그들의 대결 '판천 대전'과 6천년전의 문명 그리고 신시(神市)의 탄생.



(요하문명 연표. 크게 보려면 클릭)
★○ 헌원과 신농이 퓨전하여 신시(神市)를 이루다. ○★
기원전 5000~4000년에 서아시아로부터 채도 문화를 가지고 온 새로운 종족(환웅족=황제헌원족)이
요하 유역의 차하이(사해),싱룽와(흥륭와) 문화의 빗살무늬토기를 쓰는 돼지룡 종족과 융합하여 조보구 문화를 이룬다.
이것이 초기 환웅 부락이며 황제헌원의 부락이었다. (환웅=황제헌원)

(내몽고 츠펑시 박물관에 전시된 싱룽와 문화의 빗살무늬 토기)

(차하이,싱룽와 문화의 돼지룡 출토 : (출처: SBS 역사 다큐 - 3천년의 퍼즐 신화를 찾아서 에서)

(삼성타랍에서 출토된 홍산문화의 옥돼지룡)

조보구인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 신(운사雲師 = 황제헌원 = 환웅)과
구름 신의 부하로 새룡(뇌공),사슴룡(풍백),돼지룡(우사)이 있음을 믿었고 구름 신의 아들이 조개 신(환인)이라고 믿었다.
토착 부족의 돼지룡 신앙은 구름 신의 부하신 개념으로 편입된다.

(홍산의 조보구 문화의 새룡,돼지룡,사슴룡,구름이 새겨진 토기
출처는 ( SBS 역사 다큐 - 3천년의 퍼즐 신화를 찾아서 에서의 장면들. 왼쪽부터 조개,새룡,사슴룡,돼지룡의 순서다.)
조보구 문화에서 나오는 천손강림의 모티브는 매우 진귀한 것으로 동아시아 역사상 제일 오래된 천손강림 그림이며
선사시대에선 유일한 그림이라 할 것이다.
이 때 황하 중류에는 염제신농의 앙소문화가 성장하고있었다.

(기원전 3천 5백년~기원전 3천년 시기 중원을 다스렸다는 염제신농)

(앙소 문화 채도에 그려진 앙소 문화의 신(神) 두 뿔이 달려있고 모자의 양옆에도 뿔들이 많이 박혀있으며
두 마리 물고기가 양 옆에 있는게 특징적이다. 이것이 중국 옛 기록들에 소 머리에 사람 몸을 가졌다는
염제 신농의 모습과 흡사하다. 앙소 문화의 신은 염제 신농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3500년 시기에 황하 중류의 염제신농의 앙소문화가 북진하여 조보구 문화와 탁록에서
서로 충돌하게되어서
앙소문화인들이 패배하고 앙소문화와 조보구 문화가 융합하여 '우하량 문화(홍산 문화)' 전성기 상태로 업그레이드된다.

이것이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염제신농의 전투 '판천대전'이었고 염제신농이
패배하고 황제헌원은 두 가지 성과를 얻었다.
1. "마침내 뜻을 얻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2. "제후들의 으뜸이 되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3. "염제 신농의 석기를 이어 황제헌원이 옥기 시대를 열었다." - 월절서
앙소로부터 온 더 질좋은 채색토기와 농경 문화는 요하문명이 원시 국가(고국古國)로 성장하는
우하량 문화 단계(홍산문화) 를 창출하는 거대한 성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때부터 우하량 문화는 다음의 발전 테크를 이루어냈다.
1. 옥기의 전성기 시대를 열게 되었다.
2.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등장하며 최고 지도자는 구름모양 옥기,옥 거북이,옥벽 삼종세트와
함께 무덤에 묻혔다.(단군신화의 세 가지 천부인) 최고 지도자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그야말로 신격화된 최고의 지도자였다.
3. 원시 국가(고국 古國) 단계로 진입하였다.
4. 사회 계층 분화,계급 분화,빈부 격차가 발생하였다.
5. 정치 제사 군사권을 장악한 귀족 계급이 출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6. 옥기를 제작하는 전문 장인 집단도 출현하여 최초의 분업화가 이루어진다.
- 홍산 옥기는 옥을 파서 조각하는게 굉장히 힘들다. 구멍 하나만 뚫는데도 4~5일이 걸린다.
두 달 동안 두 사람 이상이 매달려야 제작이 가능한데. 홍산문명에서 그것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즉 이것은 부족이나 씨족 단위에서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교하게 제작할 수 있는
직업군이 분화되어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
즉 그것을 제작하는 전문적인 장인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7. 제단,신전,적석총 3위일체 개념 등 유교적 예제 개념을 갖춘 고도화된 원시 종교가 출현한다.
8. 부락 마을들과는 구별된 제사를 위한 성역(제단,신전,적석총의 집합 장소)이 출현하였다.
9. 곰룡 신앙이 출현하였다.
10. 여신 숭배가 시작되고, 여신전에 여신상과 곰이 같이 숭배되었다.
11. 이어서 곰룡과 돼지룡의 속성이 혼합된 퓨전 돼지룡 신앙이 출현하고 퓨전 돼지룡 토템족이 곰룡 토템족(최고층 집단)의
후계 2인자가 된다.


정수리에 상투를 매는데 쓰이는 동시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둥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 손에는 옥거북이 두 개가 쥐어져있고 양 귀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옥벽 두개가 놓여져있다.
그리고 복부에는 구름 모양 옥기가 놓여져있다.
석기는 하나도 발견안되었다
구름 모양 옥기,옥벽,옥거북의 3종 세트의 조합이 인상적이다.(단군신화의 세 가지 천부인을 의미)
: 우하량 제5지점 1호총 중심대묘)

묻혀있고 구름 모양 옥기가 머리 맡에 있고 정수리에 상투매는데 쓰이는 말발굽모양 옥기가 있고
복부에 짐승 얼굴 옥기가 있다.
무려 20여개나 되는 다양한 옥기들도 옷을 해입고 석기는 하나도 발견안되었다.)

옥봉황은 하늘과 교통하는 통치자를 상징.
여기서 위에서 본 최고 지도자의 옥인형이 출토되었는데. 사진에 보이는걸 독자들도 능히 알 수 있다.
: 우하량 제16지점 중심대묘)

여기서는 상투가 아닌 베개로 쓰인다. 동시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둥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복부에는 옥곰룡과 옥돼지룡이 있다. :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4호묘)

(우하량 문화의 대형 적석총,적석 제단들)


(우하량 문화의 원형 적석총. 일종의 피라미드 혹은 수메르의 지구라트적 성격을 띄는거죠. 방형도 있습니다.
MBC 다큐멘터리 '삼족오 고대 한류를 밝히다' 에서 )

( SBS 역사 다큐 - 3천년의 퍼즐 신화를 찾아서 에서의 장면들. 우하량 대형 여신전)
(우하량 문화의 대형 여신전)

(우하량 문화의 여신전에서 출토된 여신상의 얼굴 부분)


(우하량 여신상의 복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82 페이지에 표시된 우하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 곰발)

(우하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 곰턱)


(우하량 여신묘에서 나온 곰턱뼈 )

(우하량문화의 대형 피라미드 복원. KBS 역사스폐셜 : 만주 시원 대탐사 홍산문명 편에서.)
이 홍산문화(우하량문화)가 왜 환웅의 신시배달국이며 동시에 황제헌원의 헌원국이 되는지는 이미 입이 아프도록 설명했다.
다음 링크를 참조바란다.
http://ragwangfal.egloos.com/1671437
------------------------한국의 역사서가 기억하는 홍산의 우하량 문화 ------------------------------------
0. 기원전 3897년에 건국 ~ 기원전 3천년대 말기에 멸망
1. 하늘 신 환인
2. 하늘신의 아들 환웅. 별칭은 홍제(洪帝). 직위는 천제(天帝)
--- 곰족과 호랑이족을 다스림. 곰족을 지원하고 호랑이족은 퇴출시킴.
3. 풍백,우사,운사가 환웅의 최고 제사장들(단기고사에는 풍백,우사,뇌공으로 나옴)
4. 360사를 관장하고 인간 일을 5가지로 나누어 가르치고 다스리는 체계적인 신시배달의 종교+정치 시스템
& 교리
5. 웅녀라는 여신+여왕 과 곰 토템 신앙
6. 종교+정치 최고 제사장& 최고 통치자 단군
7. 신시(神市). : 마을과는 별도로 분리된 성스런 성역. 고조선의 '소도'
8. 하늘신 환인과 아들 환웅을 이어주는 천부인 세 가지
참조:삼국유사 단군신화.환단고기,단서대강
----------------------------------------------------------------------------------------------
아무튼 이 홍산 문화(우하량 문화)가 바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환단고기에 나오는 환웅의 신시배달국인데.
환단고기는 환웅의 신시배달국 건국 연대를 기원전 3897년이라 기록하고 고고학으로는 홍산문화(우하량 문화)의
개시 연대가 기원전 4천년~기원전 3500년 사이니까 얼추 맞는다~!
신시배달이란 성역인 신시(神市)와 나라로서의 개념인 '배달'이다.
단군신화에서 하늘 신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곰족에게 도래하여 문명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는 단군신화의 기록은 채도와 새로운 종족의 이주로 조보구 문화가 열리고 이어 홍산 문화가
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의 밑의 최고 제사장들인 풍백,우사,운사가 환웅의 명에 따라 인간의 일을
360가지 일로 나누어서 통솔하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5가지 일을 주관했다는 것은
홍산문화에서 일어난 귀족계급 출현,귀족들의 사유재산화,계급 분화,사회 복잡화와 연관된다.
특히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한다는건
최고 지도자,귀족 계급이 백성들의 재산,수명,형벌,선악까지 다 주관하게되고 이 최고 지도자와
종교에게 반항하는 건 곧 죽음과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거고 고도화된 종교의 발달도 상징한다.
홍산 문화에서 여신 숭배가 이루어지고 여신전이 건축되고 이것이 곰 토템과 함께 숭배된건
신시에서 환웅의 아내인 여신 웅녀(熊女)가 숭배되었고 웅녀는 사실 곰이었고 이 웅녀가
최고 지도자 단군의 어머니였다는 단군신화와 일치한다.
홍산 문화에서 적석총,여신전,제단의 집합군인 '성역'의 출현은 단군신화에서 신시神市라는 '구별된 성역의 개념'과 일치되고있다.
(신시와 신시에 세워져있었다는 신의 나무인 박달나무,제사장,구별된 성역이라는 이 네 가지 개념은
삼한의 소도에까지 연장되고있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개념인 [하늘신 환인,하늘의 아들 환웅,여신 웅녀,최고 지도자 단군,풍백,우사,운사]
의 개념도 모두 홍산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한다.


(단군신화)
"황제헌원이 염제신농의 석기 시대에 이어 옥기의 시대를 열었다." - 월절서
황제족(우하량 문화)의 최고 지도자는 제사권,병권을 거머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만인萬人 위에
군림하는 일인독존一人獨尊의 위치에 앉았다. 실로 기록에 나오는 황제헌원(환웅)의 위상과 걸맞았다.
최고 지도자는 각종 다양한 옥기들과 함께 묻혔다.
---------------------중국의 역사서가 기억하는 홍산문명 -----------------------------------------------
0. 유웅국(有熊國:곰 나라)의 기원전 3천년대 말기 임금
1. 중앙의 임금 황제(黃帝) 직위에 있음.(천제天帝의 위치임.)
2. 이름은 헌원. 별칭은 홍 임금(제홍帝鴻)
3. 나라의 관직을 운사雲師라고 부름. 풍백,우사,뇌공이 헌원의 수레 앞을 쓸음.
4. 최초로 옥기 시대를 열었다고한다.
5. 계절,기후를 연구하여 오곡 심는 법을 가르쳐주고 토지를 측량,구획하고 좌대감,우대감을 설치하고
제단을 쌓고 신들에게 제사를 많이 지냈다.
6. 중국 신화에 도철괴물(은나라 청동그릇,무씨사 화상석에 호랑이 괴물로 표현됨)로 나오는 치우와 싸워 이김.
7. "곰,큰곰,호랑이 종의 6마리를 거느리고 염제신농과 싸워 이기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8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길 헌원의 나라에는 헌원의 언덕이 있는데. 네모난 제단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산문명의 방형 적석총을 의미)
9. 황제헌원은 신이경神異經에서 '제홍'이라는 이름의 개 혹은 큰 곰 모습의 괴물로 나온다. 그 곰 괴물은
자신의 꼬리를 입에 물고 빙빙 돌며 하늘을 향해 웃는다고하는데. 홍산문화의 곰룡 옥기의 모습과
일치한다.
10. 황제헌원의 손자인 전욱은 헌원을 나이 20세에 헌원을 보좌하다가 헌원이 죽자 뒤이어 제위에 등극했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전욱의 아버지 '한류韓流'의 모습은 반은 돼지에 반은 용의 모습을 하고있다고 나온다.
(홍산문화의 돼지룡 옥기의 모습과 일치한다.)
11. '전욱'에 이어 즉위한 '제곡'도 전욱과 같이 홍산문명이 있는 요서 땅에 도읍을 두었다.
'제곡'의 도읍의 이름은 '박'으로 단군 관련 야사에 나오는 단군의 도읍이라는 '밝 땅(배달)'과
발음이 비슷하다.
12. 헌원의 아내이자 '여신'인 누조는 최초로 누에를 쳤으며 누에의 '여신'이 되었다.
이는 홍산문명에서 여신전과 옥누에가 발견되어 누에가 신으로 숭배되었음과 누에치기가 있었고
여신이 숭배되었음과 일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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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에 나오는 3개의 천부인 개념도 이 때에 출현하는데.
최고 지도자는 구름모양 옥기,둥근 옥벽,옥거북 3종 세트와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다.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최고 지도자가 묻힌 제5지점 1호총 중심대묘의 모습)
그 중에서도 최고 지도자의 최고 상징은 바로 구름과 곰룡이었다.
그래서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에는 황제헌원이 관직을 모든 관직을 구름으로 이름지어 운사(雲師)라 부르게하였다하니
구름 토템의 특징을 보여주며 이야말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운사雲師의 정체라 할 것이다.

(홍산문화 최고 지도자의 상징 구름 모양 옥기)


(우하량 문화(홍산 문화)의 채색토기들에 자주 보이는 구름 무늬)
홍산문명은 곰룡을 최고의 용신(龍神)으로 숭배하였다. 곰룡을 봐보자!

(홍산문화의 곰룡 옥기)


(상해박물관 소장 홍산문화 출토 옥곰룡玉熊龍. 사해문화 멧돼지룡은 이 옥곰룡과 달리 코끝부분이 올라가서
멧돼지처럼 되지만 이건 그렇지않고 오히려 내려간다. 입도 돼지와 달리 길지않고 짧다. )
"옥룡 머리 부분은 곰과 닮았는데. 큰 눈과 두드러진 코, 꽉 다문 입과 둥근 귀, C자 모양의 체구,머리와
꼬리가 맞물려있다. 요녕성 조양현 우하량 여신묘 앞쪽의 한 구덩이와 제2지점 2호 적석총 대묘 옆의
차워넣은 흙에서 곰의 아래턱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또한 민속학 자료 중 동북 소수민족을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곰머리의 옥룡은 홍산지역 씨족들이 숭배하는
토템의 신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황제가 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어 이른바 옥웅신玉熊神이라고 일컬어졌다고한다.
동북 지역은 곰의 중요한 거주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곰의 용맹한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신을 보는 것처럼 숭배하는 전통의 원류가 오래전부터 있게된 것으로 생각하고있다.
홍산 옥기 중에도 곰 형태로 장식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우하량 유적지 제16지점 1번 묘에서 머리 두 개의
곰 모양에 3개의 구멍이 있는 옥 장식품이 출토되었다.(옥웅수삼공기) " -상하이 박물관 소장 중국 고대 청동기.옥기 전시 전집에서-


(옥웅수삼공기)
황제헌원은 스스로를 유웅씨有熊氏(곰씨)라 불렀다고 사마천 사기는 기록한다.
중국의 사마천 사기는
"탁록(홍산문명의 땅)에 황제헌원의 도읍이 있고 황제헌원은 유웅씨有熊氏라 불린다.
전쟁할 때도 곰,호랑이 데리고 싸움."이라고 나온다.
황제헌원도 기원전 3천년대도, 홍산문명 지역의 왕이다.
이거 자체가 홍산문명이 곰 토템이었다는 사료적 근거가 된다. 기원전 4000~3000년대의 우하량 문화
시기에 여신전이 만들어지고 곰룡 옥기가 만들어졌다. 그전의 사해문화에서는 돼지룡 옥기를
만들었지만 이젠 그것이 주로 곰룡 옥기로 대체된 것이다.
여신전에선 진흙으로 만든 곰발까지 나온다.
그래서 홍산문명이 곰 토템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곰과 여신의 결합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엔 웅녀熊女로 나오는 것이고.
황제헌원의 또 다른 이름은 제홍(帝鴻)이라고 춘추좌씨전에서 두예가 주석했다.
제홍은 '제강'이라 불리는데. 제강은 '혼돈'이라고도 불린다. 이 제홍=제강=혼돈이 신이경神異經의 서황경에
곰룡의 모습으로 나온다.
"곤륜의 서쪽에 짐승이 있는데 마치 개와 같이 생겼으며 털은 길고 발은 네 개로
큰 곰같기도한데. 발톱이 없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며 걸을 때 눈을 뜨지 않는다.
두 개의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지만 사람이 지나가는 것은 안다. (...)
이름을 '혼돈'이라 부른다. (...)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돌면서 하늘을 향해
웃고 있다." -신이경 서황경
"이 신은 혼돈으로 (...) 사실은 제홍이다.(필원 주:강(江)은 음이 홍(鴻)과 같다. )" -산해경 서차삼경
"옛날에 제홍씨는...,(두예의 주석:제홍은 황제이다.)" -좌전 . 문공 18년
(홍산문화의 곰룡 옥기)
신이경의 서황경에서 하늘을 보고 웃으며 지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혼돈'이라
불리는 괴수가 나오는데. 개같기도하고 곰같기도하다고 나온다. 그 이름은 '제홍' 혹은 '제강'이라고 하는데.
제홍=제강=혼돈이란 개념은 중국 사서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다.
자기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건 중동 신화에서 나오는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우로보로스'의 개념과
유사하다. 홍산문화의 곰룡,돼지룡도 자기 꼬리를 물고 빙빙 돈다.

(그리스 ,이란 신화에 등장하는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용, 우로보로스)
문제는 이 제홍이라고 불리는 괴물이 꼬리를 물고 빙빙 돌며 개같기도하고 곰같기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개하고 곰은 진화론적으로 조상이 '곰개'로 똑같으며 개하고 곰은 생김새도 비슷하다.
그래서 곰룡을 보고 후세 중국인들은 이것이 개인가 곰인가 긴가민가하여 개같기도하고 곰같기도하다고
적은 것이다.
게다가 이 제홍은 황제헌원과 동일 인물이라고 춘추좌씨전에서 두예가 주석했다는 점이나
황제헌원이 유웅씨(有熊氏) 즉 곰씨라고 불린 점...!
이것은 정확히 홍산문화의 곰룡이 중국 고대 신화 사서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건 필자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또 춘추좌씨전의 두예의 주석에서 두예는 '제홍은 황제헌원'이라 하였다.
황제헌원은 유웅씨有熊氏 혹은 유웅국有熊國의 왕이라고 사마천의 사기 등에 자주 나온다.
즉 자신이 곰 혹은 곰의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사서와 유물이 정확히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또 중국 사서에서 흔히 황제헌원을 용과 동일시합니다. 이것 역시 '곰룡'이죠.
홍산에서 발견된 옥곰룡 유물이야말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신의 정체라 할 것이다.
(홍산문화의 곰룡 옥기)
이 때 이미 과거의 돼지룡 숭배 종족(과거의 차하이,싱룽와,조보구 문화)이 황제족과 함께 융합하여 두 가지의 돼지룡이 출현한다.
하나는 완전한 돼지룡이고 또 하나는 곰과 돼지가 융합된 퓨전 형태의 돼지룡이었다.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특별한 인물'급의 무덤의 남성의 머리에 놓여진 말발굽 모양 옥베개.
여기서는 상투가 아닌 베개로 쓰인다. 동시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둥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복부에는 옥곰룡과 옥돼지룡이 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옥룡 두 개가 매장된걸로 통해
곰룡,돼지룡 종족의 융합을 알 수 있다. :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4호묘)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4호묘에서 출토된 돼지룡 옥기의 옆 모습)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4호묘에서 출토된 돼지룡 옥기의 앞 모습 )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4호묘에서 출토된 돼지룡 옥기의 아래 모습 )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적석총에서 출토된 또 다른 돼지룡)

(우하량 문화(홍산문화)의 적석총에서 출토된 또 다른 돼지룡 )
위의 3가지 돼지룡들은 표기상 '돼지룡'으로 표기하였지만 사실 완벽한 돼지룡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다.
왜냐면 이 돼지룡들은 우리가 아는 돼지의 콧 구멍이 영 엉뚱한데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돼지의 코 구멍의 위치)



기원전 3천년 홍산문화 시기에 만들어진 돼지룡(삼성타랍 유적에서 출토된)은 밑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돼지룡을 이렇게 만드는거지. 위처럼 저런 식으로 만들면 정상적인 돼지라고 볼 수 없다.

(삼성타랍에서 출토된 기원전 3천년경 홍산문화의 옥돼지룡)
그렇다면 콧구멍이 영 딴 데 위치해서 정상적인 돼지라고 볼 수 없지만 돼지같이 보이는 저 이상한 돼지룡같은 것들은
도대체 뭘까?
그건 중국 고대 기록들에서 황제헌원의 손자라는 전욱을 말한다.
(전욱이 홍산문화와 연관된다는건 이 자료를 참고. http://ragwangfal.egloos.com/1673887 )
전욱의 아버지는 돼지룡(이름이 한류韓流)이라고 산해경에 나오는데도 전욱은 곰(황제헌원)의 손자라고
사마천 사기,제왕세기 등에 기록되어있다.
황제헌원은 유웅씨(有熊氏)라고 불리며 그는 제홍으로 불리며 제홍은 '신이경'에서 곰룡의 모습을 하고있다.
왜 돼지룡의 아들이 곰룡의 손자가 되어있는 것일까?
이 모순은 양 종족의 융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돼지룡 종족이 홍산문화의 곰룡 종족(황제헌원족)의 지배 아래 복속되고 그 후에 곰룡 종족과 융합하여
후계 2인자 자리를 꿰어차게된 것이다. 그렇게하여 정상적인 돼지룡이 아닌.., 그야말로 곰룡과 돼지룡이 합체한
새로운 형태의 곰+돼지룡이 된 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의 곰룡,돼지룡을 논하였다.
이제 홍산문화의 여신 '웅녀熊女'를 논해보자.
곰과 함께 숭배되는 홍산의 여신은 그야말로 단군신화의 웅녀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82 페이지에 표시된 우하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 곰발)
"여신묘의 주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
-183p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성안당 출판사

(홍산의 여신)
홍산문화는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문화의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도기를 일부러 깨서
매장하거나 진흙으로 여인상을 만드는 습속은 모두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와 관련이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양사오 문화의 여러 곳에서는 도기로 만든 사람상이 발견되는데 토르소 형태도 있고 임신한 여자
형태도 있으며 머리만 있는 경우도 있어. 이들은 코카서스 인종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이 소조상이 나온 지역은 웨이하(위하) 부근으로, 이곳은 오랫동안 동서문화가 교차한 곳이야.
아마도 여성 소조상들을 만든 무당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무당일 것이다.
우하량의 여신묘에서도 이런 종류의 토우와 거대한 트기의 여신이 나왔어. 모두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영향이라 볼 수 있지.
우하량에서 나온 거대한 크기의 여신은 파란색 눈을 가지고 있어. 사석에서는 중국 학자들도 갸우뚱해하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고백하고는 해. 까만 눈을 가진 황제족이 여신상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까만 눈이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야.
게다가 음팡진 눈과 큰 입은 동양인 이목구비와는 영 딴판이지." - 326-327P 김인희의 소호씨 이야기에서
홍산문화(우하량 문화)의 여신 숭배나 홍산문화의 채도는 앙소문화를 통해 서아시아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서아시아의 여신 숭배,흙으로 여신상 만드는 문화가 홍산문화로 유입된 것이다.

(우하량 문화의 여신전에서 출토된 여신상의 얼굴 부분)
산해경에 이 여신은 여발女魃로 등장한다. 여발은 황제헌원의 딸로 가뭄의 여신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적수赤水 물가 멀리에 거주하게하여 따로 숭배받게하였다고 나온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있어 황제여발이라고 한다. (...)
황제(黃帝)가 천녀인 발을 내려보내니 비가 그쳤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자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숙균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후에 그녀를 적수(赤水:붉은 물 즉 홍산紅山의 강)의 북쪽에 두어 살게 하였고
숙균은 그리하여 밭농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발이 때때로 그 곳을 빠져나오면 그를 쫓아내려는 사람들은 "신이여! (적수의) 북쪽으로 돌아가소서!"
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우선 물길을 깨끗하게 하고 크고 작은 도랑을 터서 통하게 해놓았다."
- 산해경 대황북경
중앙아시아 사막 혹은 그 너머에서부터 온 여신은
홍산인들에게 있어선 모래 사막을 통과해온 가뭄의 여신으로 여겨져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두려웠냐면 그들은 그들의 집단 숭배 묘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여신 사당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따로 숭배할 정도였으니..,
단군신화에서 이 여신은 웅녀熊女로 등장한다. 여신묘에선 진흙 곰발과 곰 턱뼈가 출토되어 여신과 곰이
함께 최고의 위치에서 숭배되었음을 증명하고있다.
시베리아 신화에서 곰은 어머니 여신의 자식으로 등장하는데. 시베리아 신화는 홍산문명의 신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결론 요약:
1. 기원전 5000~4000년 조보구 문화는 서아시아 채색토기 문화의 전래로 이루어졌다.
조보구 문화는 환웅(황제헌원)의 초기 부락이고 이 때 최초의 천손강림 신화가 탄생했다.
2. 이 당시 중원의 황하 중류 유역에 염제신농의 앙소문화가 있었다.
3. 기원전 4000년경에 조보구 문화가 우하량 문화 단계로 진입한다.
기원전 3500년경에 홍산 근처인 판천,탁록 일대에서 앙소문화와 부족 충돌을 일으켜(판천대전)
이들이 서로 융합하여 '본격적인 우하량 문화 단계(홍산 문화)'로 진입한다.
적석총,제단,여신전이 건립되어 '원시 국가 단계(고국古國)'로 진입한다.
일반 마을과는 구별된 적석총,제단,여신전의 집합군 즉 '성역'의 출현이 이루어진다.(단군신화의 신시神市)
이것이 환웅의 신시배달이며 황제헌원의 헌원국이다.
우하량 문화(홍산문화) = 환웅의 신시배달 = 황제헌원의 헌원국
4. 홍산 문화의 최고 용신(龍神)은 곰룡이었고 이는 황제헌원(환웅)과 동일시되었으며 이것이
단군신화의 곰신과 연결된다.
5. 이후 홍산문화 안에서는 돼지룡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이 황제헌원으로 대표되는 곰룡 종족과 융합을 이루어
후계 2인자 종족으로 굳혀져가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중국 사서에서 황제헌원의 손자 '전욱 고양' 임금으로 나온다.
6. 홍산 문화의 여신 숭배는 단군신화에는 웅녀熊女로 , 중국 사서 산해경에는 황제헌원의 딸 '발'로 나온다.

이 연구는 여러분들의 후원금으로 만들어집니다.
킹제임스성경 고린도전서 9: 11 만일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다면 우리가 너희의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
해서 그것이 대단한 일이겠느냐?
* 국민은행 563402 -01 -241756 최문석


네이버 카페 '동방.서방제국 집현전' http://cafe.naver.com/nagwangfal
덧글
황제헌원의 모습이 신이경에서 '곰룡'으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황제헌원은 홍산문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국대륙의 다른 곳에서는 황제헌원과 일치하는 다른 문명의 존재가 전혀 드러나지않습니다.
홍산문명은 옥기문명이지. 청동기로 무장하고 싸우는 전투국가가 절대 아닙니다.
제정일치 사회,제의적인 것에 지나치게 쏠린 원시 국가(고국古國)입니다.
치우천황은 량주문화입니다.
산동의 대문구 문화 = 소호국
황하 중류의 앙소 문화 = 염제신농입니다.
http://ragwangfal.egloos.com/1674485
치우천황이 홍산문화란 고고학적 증거는 전무全無하며 모든 고고학,사료적 기록을 검토했을 때 치우천황은 량주문화(장강문명)이지. 홍산문화가 아닙니다. 확실히 아시기바랍니다.
홍산문명은 고조선 이전의 나라이며 나라 단계에 접어든 문명을 가진 유적인건 아시죠? 바로 배달국을 뜻하는 나라가 홍산문명인데...치우천왕을 부정한다면 배달국도 부정되어야 정상 아닌가요? 거기에 헌원을 끼워 넣는다는건 홍산문명 또한 중국의 역사다란 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도 14대 환웅은 치우라고 되어 있습니다..전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면 산해경보다 환단고기가 더 신빙성 있고 정확하다고 보기 떄문입니다..산해경은 고작 치우와 헌원의 전쟁만 나오지만 환단고기는 치우와 헌원의 전쟁은 물론 연대기와 인물의 이름등 세세하게 나와 있는게 환단 고기 입니다..믿지 않는다고 하여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난중에 진실된 역사는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까요..식민사학은 영원할수 없기 떄문에 전 정의 를 믿습니다..
홍산문명이 워낙 오래전의 역사이기에 중국에선 황제헌원으로, 한국에선 환웅으로 기억하는데.
태백일사는 조선시기의 사서이고 태백일사의 근간되는 사료가 고구려,고려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측한다면 고구려,고려,조선 어느 시기에 황제헌원을 다른 종족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임의적으로 기록을
추가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배달국이 부정되는건 절대로 아닙니다.
환단고기의 배달국은 기원전 3897년~기원전 2700년까지로 연대가 되어있는데. 이건 홍산문명의 연대가
매우 근접하게 일치하고있습니다.(홍산문화가 기원전 4천년~기원전 3천년)
안후이성의 링쟈탄을 거쳐온 홍산의 옥기문화를 전수받은 것이구요.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에도 진운씨(황제헌원)의 서자 아들이 바로 도철(치우)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량주문화(치우국)는 홍산의 영향을 받아 생겼으며 치우 신앙의 원형도 홍산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중국이고 한국이고를 구분하면 매우 주관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중국의 기록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홍산이 황제헌원이 아니라고 봅시다. 그렇다면 황제헌원의 문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않게되는겁니다.
홍산문화는 고고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치우의 문명으로 절대 볼 수가 없습니다. 청동 무기가 전혀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산보다 나라의 틀이 '방국' 형태로 매우 강성햇던 량주는 도철을 숭배하고 후에 황하 유역으로 치고 올라가 룽산 문화(용산 문화)를 세워 청동기 문화를 크게 일으키고 북진하여 탁록까지 진출함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됩니다.(기원전 2700년대)
이게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탁록대전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 있는데 남에것에 의존하는게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발음이 유사하다고 헌원이 환웅이 된다면 이세상에 유사한것은 다 이것이고 저것이고 다 똑같겟지요..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환웅이란 말은 배달국이 세워지면서 사용하던것입니다..그런데 유사하다는 이유로 헌원이 환웅이 될수는 없는것입니다.. 환단고기에도 나왔듯이 헌원시절 14대 환웅은 치우천왕이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그렇다구요.
같은 말만 되풀이하시니까 답답하군요.
제홍씨님 치우문명이라뇨....누가 치우문명이고 헌원 문명입니까..한 나라의 왕이 다스린다고 해서 그 왕의 문명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 그 나라의 문명일수는 잇어도...왕의 문명은 될수 없어요..
그럼 치우문명에서 안나온 청동기가 헌원문명에서 나왔다는 소린가요?ㅎ 유물로만 역사를 본다면 한계가 잇습니다...그리고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산동성 밑에 까지도 구이(배달국)의 영토엿습니다..알고 계신지요?정확히 수도가 어딘지를 모르겟으나 전 홍산문명이 시작이고 후대에는 산동 아래쪾으로 옴겨갔을거라 생각합니다..
홍산문명이 치우의 것이라면 왜 치우의 청동기가 안나옵니까?
게다가 홍산문명은 치우처럼 전투적인 국가가 아니라 제사장의 국가입니다. 전투하고는 거리가 영 멀다구요.
하지만 산동의 대문구 문화는 삼족오 모양의 '규'란 그릇으로 대표되는 새 숭배 문화이며 옥기보단 석기의 양이 많고 추장 사회를 벗어나지못했고 원시 국가 단계로 진입도 못했으며 토광식목관묘를 썼을 뿐
적석총,석관묘를 쓴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채도보다는 회도 등의 비율이 많습니다.
하지만 산동의 대문구 문화는 삼족오 모양의 '규'란 그릇으로 대표되는 새 숭배 문화이며 옥기보단 석기의 양이 많고 추장 사회를 벗어나지못했고 원시 국가 단계로 진입도 못했으며 토광식목관묘를 썼을 뿐
적석총,석관묘를 쓴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채도보다는 회도 등의 비율이 많습니다.
중국대륙에서는 배달국에 해당되는 문화가 전혀 없고 요하 동쪽의 만주,한반도 일대에도 배달국에 해당되는 수준의 문화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홍산 밖에 없다는겁니다.
치우도 기원전 3천년대입니다. 어딜 봐서 아니라는겁니까?
거기는 석기를 주로 쓰던 동네이고 도자기 만드는데 취미 빠진 애들이에요.
걔들이 무슨 치우라는겁니까?
산동 남부에까지 치우의 배달국의 영토가 있었다면 치우의 호전적인 전쟁 문화가 어떤식으로든 유물 유적에 나타나있어야되는데. 그렇게 없다는겁니다. 전혀요.
홍산문화 배달국 이런걸 다 때려치운다구요? 어떻게 선조의 문화와 역사를 때려치운답니까?
자기 민족이 이렇게 말한다고 그 민족의 사상,사고관에 평생을 바치고 역사를 연구하면 동북공정하고
다를게뭐고 일본의 독도하고 다를게 뭡니까?
진실이 중요한거지요. 우긴다고해서 진실이 되는것도 아닌데. 그걸 민족의 영광이라 하면 중국,일본하고 다를게 도대체 뭡니까?
그건 역사를 사랑하는게아닙니다.
진실을 찾는게 어찌 천벌입니까?
오히려 황제헌원(환웅)이 들으면 대노하시겠군요.
진지하게 고고학적 증거에 숙연해지고 경청하셔야합니다. 그게 바로 선조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중국 사서의 저술 연대는 동북공정이 이루어지는 연대하고는 천지 차이로 먼 옛날인데요?
그 사람들은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적은 것뿐인데. 왜 이리 마녀사냥입니까?
절충해서 황제헌원 = 환웅이라 한거고 배달국의 왕이 치우천황이라는건 고고학적으로 전혀 그러지못하다고 결론내린겁니다.
이게 어딜 봐서 치중하는겁니까?!
이런 것을 '치중했다.'라고 한다면 정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있는 사실을 쓴거라..하셨는데..그게 왜곡되었다곤 생각 안해보였나요?
도대체 어떤 사서가 검증이 됫는지 궁굼하군요...
그리고..전 홍산문명을 중국이 중화사상으로 만든다고 햇지 동북공정은 꺼내지도 않았거든요..
헌원 치우 염제 신농을 중국의 시조로 만드는게 역사공정이 아니고 멉니까...동북공정은 시작에 불과 합니다.
홍산문명을 중국화 하기 위해 동북공정은 시작에 불과 하다구요...
이게 증거입니다.
그걸 증거로 고대 중국 기록이 왜곡되었다고 님이 말하는건 님이 시공간을 착각,왜곡하셔서 하시는 말씀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그 당시 중국,한국이란 뚜렷한 구분이 없었을 뿐더러 홍산문화를 담당한 사람들은 기원전 3천년대에 기후대재앙으로 망하여 중국으로 많이 이동,피난하거나 일부는 홍산에 남아서 소하연문화를 열고 그 후에는 기원전 2천년에 하가점하층문화(단군조선)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가점하층 종족이 황하로 이동하여 기원전 1800~1700년에 상나라를 세웁니다.
상나라의 후손이 오늘날의 중국이구요. 그러니까 꼭 중화사상으로 왜곡했다기보다는 그냥 자신들 조상이라서 적은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배달국의 왕이 치우천황이라는건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겁니다. 고고학적으로.
왜 자꾸 제 말을 왜곡할까요?
어찌 얕은 지식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이해시키려하는가. 그런다고 역사가 바뀌는가.
불쌍하다. 제발 이 나라에서 사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천손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홍산문화 고조선 관련하여 많은 자료를 받아갑니다.
무엇보다도 값진 글들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동북삼성을 오가며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우리 동포들을 보면서
많이 아쉽고 아팠죠
중국역사는 2~3백년을 이어가지 못하였고 역사는 반복되므로
다시 배달국때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세계평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가 약탈과 수탈이 아닌 융합정책으로 이루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