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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탄! 왕검성 = 낙랑군은 절대로 아니란 결정적 증거들. by 제홍씨帝鴻氏


이 글은 폐기처분된겁니다. 

이 글의 주장은 전부 헛소리입니다. 


설명 귀찮으니 이거 보기 바람. http://ragwangfal.egloos.com/1688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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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계가 왕검성이 낙랑군 위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뭘까?







                                                  (위만조선을 배신하고 한나라에 붙은 역적 왕협)




(낙랑군의 낙랑토성의 그래픽 복원)


(북한의 평양 낙랑 구역(낙랑군)의 낙랑 토성)





동북아역사재단의 오강원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겠다. ( '고조선,단군,부여' 동북아역사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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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위 때 사람인 역도원의 '수경주'를 보면 북위로 파견된 고구려 사신이
역도원에게 고구려 도성이 패수 북쪽에 있고 패수가 그 곳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간다고 말하니까


2. 기원후 5~6세기 때에 지금의 대동강을 고구려 사람들이 패수라고 불렀음


3. 낙랑군 유적이 평양에서 발견되었음.


4. 후한 이후의 한참 늦은 시기의 신찬이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함.


5. 기원전 300년 연나라 진개의 침략 이후 요동의 고조선 비파형동검문화가 사라지고 평안도에
세형동검 문화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평안도에서 왕검성을 찾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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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근거가 빈약하다.


1번 2번은 그냥 패수라는 강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지.
그렇다고 그 패수가 왕검성의 패수란 증거는 없다.


한 예로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의 묘지명에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나라를 열었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선 패수가 비류수가 되는 것이다.
패수는 대동강이나 청천강만 있는게 아니란다.


3번은 그냥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지. 왕검성이 평양에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5번 증거 역시 빈약하디 빈약하다.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찾으려면 일단 위만조선이란 국가의 성격에
대해 잘 파악해야한다. 문헌을 파악해볼 때 위만조선은 철제무기에 기반하여 수천리를 정복한 강력한 정복국가이며
한나라와 1년을 싸운 강력한 국가엿다.

그러나 평안도에선 위만조선 시기에도 여전히 세형동검문화가 주류였다.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는건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 이후에서야 가능하게되었다.
평안도가 위만조선의 중심지라는건 고고학을 무시한 개드립이다.







4번은 후한 이후 어느 시기인지 모를 한참 늦은 시기의 신찬이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말한건데.
이거는 후한의 응소가 한서 지리지에 주석할 때 "왕검성은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라고 주석한 걸
한참 후의 후배인 신찬이 보고 빡쳐서 "왕검성은 패수 동쪽에 있다고 문헌에 나오고 낙랑군에 패수가
있으니까 왕검성은 낙랑군임!"이라고 주장한거다.




그렇다면 신찬의 개드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왕검성 = 낙랑군 = 평양 설이 되는거다.




낙랑군 =평양 설은 맞지만 왕검성=낙랑군=평양 설은 개소리라 이 말이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경우는 어떨가. [사기],[한서] 등에 위만조선은 무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한 제국의 무력에 맞서 1년여 동안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기반을 갖춘
국가체로 묘사되어있다. 정황으로는 발달된 철기 문화를 영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서북한 지역에서는 앞서 문헌에서 보여주는 위만조선의 실체를 웅변할만한 대규모 유적이
조사된 예는 없다."
-4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세죽리-연화보 유형에서는 철제 농기구 및 병기가 많이 제작되고,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견되며
무엇보다도 세형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도 바로 전시기인 기원전 5~4세기에서는
윤가촌 등에서 세형동검이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의 영향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세형동검이 발달되어서 남한의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펼쳐지고
토광묘가 발달한다. 그러나 세죽리-연화보와는 달리 명도전이 발견되지 않으며.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단계가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 고조선 이래의
문화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 당시 지배 세력의 주 묘제는 여전히 세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54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분명 [사기],[한서]의 기록은 기원전 196년~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5천 기마대를 보유하고있고
한나라와 1년 동안 전쟁을 할 수 있고, 한나라의 5만 대군에도 쉽게 함락되지않는 왕검성이란 강력한
성이 있었다.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도 한나라의 공격이 아닌 내분에 있었다.

위만조선이 조선,진번,예맥,임둔 등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영토 수천리를 보유했다는건
'정복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며 이런 정복력의 원동력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요동군의 후원을
받아 한나라의 발달된 철기도 많이 공급받았다는 것에서 나온거다.


그런데 청천강 이남에선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까지는 청동기가 주류이지. 철기는 소수에
불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인 기원전 1세기 시점에서야 청천강 이남에선 목곽묘가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한나라의 철기가 청동기를 '조금' 대체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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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이남(낙랑군 지역) 무덤 양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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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 세문경,과 출토,수레 부속은 안 나옴(기원전 2세기 토광묘)

2단계 - 마구,수레부속 출토,세문경,과는 보이지 않음

3단계 - 기원전 1세기 시점이다. 낙랑군 설치 이후인데. 목곽묘가 사용되며 청동기,철기가 비슷한 비율로 발견됨.

4단계 - 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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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설치 이후 목곽묘-기원전 1세기(목곽묘는 묘제의 형식상 토광묘에서 한단계 진전된 형식이며
부장품 면에서도 1식 세형동검보다 늦은 2식 세형동검이 부장되고 일부 세형동검이 철제단검으로 변화되어
부장되기도한다. 강철제작기술의 확산 속에서 철제무기와 공구의 부장이 늘어나는 동시에 종류도 다양해지며
거마구의 부장도 보편화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라는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으며 앞시기 세형동검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51p)


"기원전 1세기 대 목곽묘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목곽묘(기원전 2세기의 토광묘와 기원전 1세기 목곽묘 두 개가
있는데. 기원전 1세기의 목곽묘 중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목곽묘
기원전 2세기의 토광묘의 유물 조합과 상당히 유사한데.
철기의 수량이 한 두점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는(청동기가 다수를 차지하고있다.) -세형동검,동모,동과,동촉 등...,"
(81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기원전 1세기 목곽묘(낙랑군 설치 이후)의 부장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철제무기,공구 및 거마구가 주종을
이룬다.
(...) 전체적 유물 양상이 고조선 이래의 재지적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고조선 토착 세력 무덤으로
판단."


"군현 지배 초기의 목곽묘 단계에서는 고조선 이래 전통적인 한국식 동검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국랍중앙박물관 '낙랑' 도록)

"목곽묘의 조영자는 고조선 단계부터 서북한 각지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를 통할하던 지배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라는 정치적 사변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기반을 해체당하지않고 재지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군 치하인 기원전 1세기에도 여전히 위만조선의 재지적 기반을 유지한채 지배세력들이 존속되었음을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목곽묘라는 분묘의 문화 현상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8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요약하자.
요약하자.


요약하자.

요약하자.





1.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로 청천강 이남(낙랑군 지역에서)에서 목곽묘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토광묘가
사라져감. 이 때부터 점차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기 시작하지만 세형동검문화라는 기본 틀 아래 부수적으로
포함되어 확산되어갔다.
고로 기원전 196년에서 기원전 108년까지 거의 100여년 동안 수천리의 영토를 보유한
철제무기에 기반하고있고 한나라와 1년이나 겨룬 정복국가 위만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므로
청천강 이남에 위만조선의 중심지,수도는 있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청천강 이남의 기원전 2세기와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있던 중간 매개체로서의 목곽묘 조차
세형동검 등 청동기가 다수를 차지하여 부장품의 중심을 이루고있고 철기는 소수를 차지하고있다.
쉽게 말해 기원전 196년 - 기원전 108년 사이에 청천강 이남에는 한나라와 1년 동안 겨룰 정도의 강력한 국가는
있을 수가 없고 있다한다면 그건 유령이란 소리다.


뭐.., 백 가지 말도 최몽룡 교수의 한 마디로 요약가능하다.


"(청천강 이남은)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2. 기원전 1세기에 낙랑군이 설치되고 목곽묘가 본격 조영되지만 세형동검을 사용하기 고집하는
기존 토착세력(고조선계)의 지배가 무너지지않고 유지되었다.(낙랑군이 토착세력의 지배를 무시못함.)
이 지배세력들은 한나라의 우수한 철기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청동기 철기가 반, 반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 사실들은 이들이 기존의 문화를 반 정도 고집하고있었단 것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건


- [사기],[한서] 등에서 위만조선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왕검성 함락 이전 항복한 우거왕의 주요 신하들 모두가
기존의 자신들의 땅으로 못 가고 중국의 산동에 땅을 하사받고 나중에 대부분 제거를 당했다는 점은
즉 왕검성에 있던 기존의 대신,호족들은 한나라에 항복을 햇음에도 불구하고 물갈이를 당했으며
그들의 토착 영역에서의 지배를 한나라가 원치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의
목곽묘의 조영자들은 토착 지배를 인정받고 잘먹고 잘살고있다. 기록의 모습과 너무 다르므로 낙랑군 일대가
왕검성이 될 수 없다는 또 다른 증거다.


- 기원전 1세기 이후에야 청천강 이남에서 목곽묘가 주종을 이루고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지만 세형동검문화라는
기본 기조에는 변함이 없고 토착세력들이 자신의 문화를 여전히 고집을 하여 청동기 반,철기 반으로 한 것으로 볼 때
이 곳이 철제무기에 기반한 정복국가 위만조선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모순이 상당히 많다.




세형동검 문화를 여전히 유지하는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낙랑 사회는 기원전 1세기의
낙랑군 설치 이후에도 족장사회의 틀은 여전했다.
이런 이들에게서 위만조선 국가의 존재 가능성을 찾는 것 자체가 병신짓이다.







자.., 아무튼 왕검성에 위만이 도읍한 후 세력을 확장시켜 진번,임둔이 항복해왔다고 [사기],[한서]의 조선열전이 말하니까
낙랑,진번,임둔 모두가 왕검성의 후보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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