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굔군의 왕검성 주장에 대한 반박 1편 (Ver 1.1) by 제홍씨帝鴻氏

굔구니의 글에 대한 핑백 ^^


굔군의 왕검성 주장에 대한 반박 1편 (Ver 1.1)







굔군의 왕검성이 졸본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



굔군은 내가 왕검성이 졸본에만 있다라고 말했다라고 멋대로 단정지은 후 압록강 수로를 이용하여 혼하에까지
거슬러올라가 졸본을 공격하는 전략은 힘들다 했다.

하지만 나는 왕검성은 집안시에도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내 이미 그 난독증을 지적했건만 또 이런 오류를 저지르는가?


아무튼 난 왕검성이 졸본,집안 둘 중 하나다라고 말했으니 일단 졸본만 대상해서만 까는건 문제가 있다.

압록강으로 통해서 집안으로 올라가는 전략도 있으니까.








그리고 누선의 수군이 꼭 배를 타고 저 집안 멀리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어느정도 이동하다가 배에서 병사들을
드랍시켜서 은밀하게 이동시켜서 왕검성까지 갈 수도 있다.



그리고 졸본에 성을 포위할만한 지형이 호수로 인해 좁고 여건이 넉넉치않다는 주장 역시 지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알기론 오녀산성 근처의 큰 호수는 나중에야 생겨난거지. 한나라 당시엔 없던 것으로 안다.




(이 큰 호수는 나중에야 생겨난걸로 알고 있다.)


위만조선이 현도군에 도읍하고 있었다면 졸본 쪽에 왕이 거주하는 군사적 거점 성을 마련해놓고
집안에는 산성과 평지 토성으로 이루어진 성을 구축하여 왕도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하면 패수(혼강)를 사이에 두고 한나라와 경계하며 졸본의 험고한 요새를 방어 요새로 삼고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글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논의하기로하로 바로 밑에서 굔군의 다른 엉뚱한 말에 대해 반박해보자.




굔군의 왕검성=집안 설 부정에 대해 제시한 근거가 황당















굔군은 왕검성이 집안임을 부정한다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역사상 어떤 왕조가 집안(국내성)을 공격할 때 수군을 사용했는가?"







                                               비슷한 사례는 있었다.  멍청아.









위나라는 서기 238년 요동군 정벌하기 전에 앞서 한반도의 낙랑(평양),대방(황해도)를 수군으로 몰래 
건너가서 기습 점거하게했다.
그리고 서기 244~246년 고구려를 공격할 때 요동의 관구검이 국내성을 치고 낙랑,대방의 군대가 국내성 내지는 동천왕을 잡으려는 목표로 북상하여 고구려를 치다가 백제의 고이왕에게 빈 집이 털린 바 있다.

물론 낙랑,대방의 군대가 이 때 출정할 때 수군은 아니었지만 중요 요점이 무엇인가? 고구려의 남쪽에 군대를 배치하고
요동군의 퇴로를 막으면서 고구려도 견제하는 이중 장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전연,후연이 고구려를 칠 때 수군을 사용한건 걔네들이 수군을 주로 안쓰고 낙랑군이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가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남쪽 거점을 제대로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당 때 수군 작전으로 압록강을 통해 국내성을 공격한 적이 없던건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이지. 국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왜 드는지 모르겠다.


압록강 중상류 지역이 수군을 이용한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자네의 말일 뿐이지. 그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단정짓는 것도 우스울 뿐더러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압록강 하구에 한나라 군사를 상륙시킨 후 집안으로 말발굽을 돌려
은밀히 진격할 수도 있다는건 내 이미 방금 전의 글에서 이미 말한 바! 



자, 정리하자면 한무제 때는 졸본,집안에 두 중심지를 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위해서는 패수 방어선,험준한 졸본의 요새들을
뚫어야하는데. 이 작업이 힘들었고 위만조선의 남쪽에 한나라가 확보해둔 거점이 없었기에 수군 작전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끝으로 기원전 109-108년의 왕검성 전투와 7세기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 당시 수도를 중심으로 한 수군 작전이 서로
유사하다고 평양이 낙랑군이란 증거가 되진않는다.  


낙랑군의 중심 성읍인 '조선 현'이 '조선'이라고 해서 이 지역이 곧 위만조선의 수도라는 견해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전한,후한을 통틀어 평양 일대가 왕검성 수도라는 인식도 전혀 없었을 뿐더러 
북한 일대는 위만조선 이전에도 고조선의 영토였고 졸본,집안에 중심지를 둔 위만과는 달리 고조선의 준왕 때는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에 밀린 후로 청천강 이남에 중심지를 두게 되었기 때문에 위만 이전에는 이 곳이 조선의
중심지이므로 그 것을 감안해서 '조선'이라는 현 이름을 붙였을 수 있다.

게다가 사서 어디에서도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의 수도에 도읍했다는 기록은 없다. 
낙랑군 설치 이전 기원전 2세기에 축성된 낙랑토성의 존재는 토착적인 요소를 내재하고있어 오히려 위만조선의 수도가
아닌 준왕의 고조선 수도로 봐야 옳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북한 일대는 사료에서 확인되는 철기로 무장한 국가인 위만조선의 위상과는 달리 세형동검이 주류이고
철기 무기는 거의 나오지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철기 무기가 나오기 시작하는건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 이후부터다.
사실이 이러한데. 


굔군은 위만조선이 낙랑군이란 증거를 제시한다면서 고고학적인 증거는 커녕 사료 장난만 치고 있다.
답답한 놈일세.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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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날치 2012/04/29 02:49 # 삭제 답글

    식민빠들이 왜 식Q라 불리우고 무식하다, 거짓말쟁이다, 사기꾼이다, 엉터리다라고 비난을 받는지 그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놈이군요.
    만리장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해댄 소하라는 놈과 죽이 맞아 역밸에 욕도배할때부터 수준을 익히 짐작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제홍씨帝鴻氏 2012/04/29 03:00 #

    그러게말입니다! 허허허허허!
  • 헐참 2012/05/16 15:56 # 삭제 답글

    그 낙랑과 대방의 위치자체가 논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 시대 낙랑과 대방이 지금비정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면 그 기사가 훨씬 자연스럽죠. 낙랑의 위치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두번인가 바뀌었죠.
  • 제홍씨帝鴻氏 2012/05/16 20:07 #

  • 제홍씨帝鴻氏 2012/05/16 20:07 #

    낙랑 대방은 한반도가 맞습니다.
  • 헐참 2012/05/16 21:18 # 삭제

    낙랑은 두번 멸망하죠. 첫번째 멸망은 낙랑국으로 다른 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첫번째 멸망때 신라에 귀순한 낙랑인들 사이에 대방인이 같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최소한 한 번이상 재건되었다는 것이고 위치상 서로 다른 증거들이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공손가문이 고구려 남쪽으로 양방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보다는 요동-대방-낙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고 말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16 23:13 #

    공손가문의 황해도 점령은 삼국지 정사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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