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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위만조선사 연구 1편 -쇠퇴와 재기, 변혁 by 제홍씨帝鴻氏

굔구니의 글에 대한 핑백 ^^



고조선의 후퇴로부터 위만조선의 성립까지







위만조선의 중심지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위만조선 이전에 있던 고조선과 고조선의 중심지.
그리고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진개의 요동의 성,요새 , 진나라의 요동외요, 한나라의 요동의 옛 요새 수리와
조선과의 패수 국경, 패수의 동쪽에 있는 상하장과 상하장이 위만조선의 중심지라는 점.
위만이 상하장으로부터 왕검성으로 도읍을 옮긴 점 등 여러 문제들이 논의되어야하는데.


이런 문제들이 항상 논의될 때 맨날 사료를 두고 지명 논쟁만 되풀이될 뿐이었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어려워서 '아. 그렇나보다.'하고 쉽게 강단으로 붙거나 쉽게 재야로 붙었다.

이런 문제는 역사와 고고학 지명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서술,연대기식으로 설명하지못하고 자꾸 논쟁만 하기에
반복된 고질적인 문제였다.

필자는 이를 바로 잡기위해 서술,연대기 방식을 선택하였다.




글의 1편은 고조선의 후퇴,위만조선의 성립


글의 2편은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총 2편으로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이 아니고 현도군 즉 고구려의 초기 수도 졸본,집안 일대임을 입증하겠다.





고조선의 후퇴로부터 위만조선의 성립까지





"연나라가 동호를 습격하여 천리 밖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염철론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기원전 4세기 말) 일찌기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사기 조선열전

"동명의 후예가 조선이다." -연남생묘지명

"현토는 옛날의 진번이다." -한서지리지 현토군편 응소의 주석


요서 조양 일대에서 비파형청동검 중심 문화를 이루던 동호東胡(십이대영자 문화)와
심양 정가와자에서 동호족의 왕자 동명(東明)이 이동하여 심양의 토착 예맥 세력과 연합하여 세워 비파형동검 중심 문화를
일군 조선국
그리고 요동반도 남단에서 누상,강상 무덤을 조영한 진번국.









(연나라 진개의 동호,고조선,진번 침공)



그런데 이 세 나라가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크게 패해 후퇴한다.

동호는 동북쪽으로 도망간다. 이후 흉노에게 쳐발리고 더 동쪽으로 도망하여 오환족이 된다.
진번국은 길림 졸본,집안 일대로 도망가서 다시 새로운 진번을 이룬다. 진번의 일부는 한반도의 황해도로 이동한다.
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도망가서 세형동검 중심 문화를 일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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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않았다.










"(기원전 3세기 초)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 외요(요동 바깥 요새)에 소속시켰는데..."
-사기 조선열전



진시황은 연나라를 멸하고 연나라의 요동을 점유한 후 고조선에 대한 비극을 더 진행시킨다.
청천강 이남에까지 만리장성을 쌓고 압록강 이남~청천강 이북에 이르기까지 '요동 외요' 즉 요동의 바깥에 있는 요새를
설치하고 만리장성도 쌓아 평양에 이르게까지하여 조선을 관리한다.




(연나라 장성(장새)과 진나라 장성(요동외요)을 이은 만리장성)




고조선은 진시황에게 이를 갈며 복수의 기회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죽고 한나라가 일어서자....!


"(진한 교체기 기원전 208~기원전 202년 사이) 조선이 요(진의 요동 외요)를 넘어 연의 동쪽 땅을 강취하였다."
-염철론


이후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은 한나라 초기(기원전 2세기 초)에 한나라와 고조선은 패수를 경계로 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이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부속시켰다."-
사기 조선열전-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 인용 '위략'

한나라는 요동 외요를 포기하고 요동에 거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패수는 어디에 있었을까?






"[한나라 사신]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요동의 옛 요새=요양)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사기 조선열전


사기 조선 열전에서 한나라 사신 섭하는 패수를 건너 바로 요새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로 보아 패수와 요동의 옛 요새는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자면 패수는 압록강이거나 혼강(패수=비류수)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 왕) 준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부하가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삼국지 동이전 한전 인용 '위략'

위만은 요동의 요새를 나와 나와 패수를 건넜는데. 이 방향이 '동쪽'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그리고 조선의 영토도 아니고, 한나라의 영토도 아닌 말 그대로 '빈 땅'인 상하장에 머물렀다.

이 기록을 보면 패수가 어디인지를 대충 알 수 있다.
패수는 요동의 '동쪽'에 있다. 그렇다면 패수는 남쪽인 압록강보다는 혼강(비류수)이 정확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패수를 대동강이라고 하는건 서진-남북조시대부터 나온거지. 한나라 때에는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인식 조차 없었다.


그러면 이 패수는 어디일까? 연남생묘지명에 패수를 혼강(비류수)으로 비정했다.


"옛날에 동명은 하늘의 기에 감응하여 태어나 사천을 건너 나라를 세웠으며, 주몽은 해를 품어 태어나
패수浿水를 건너 나라를 열었다."
-연남생묘지명





(주몽의 첫 도읍지, 졸본(오녀산성). 기록상의 철옹성인 '왕검성'과 우거왕이 싸웠다는 험준한 자연 요새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사기],[한서]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 우거왕이 한나라와 싸울 때 '험준한 곳'에서 싸웠다고 한다. 또 왕검성은 험준하여
1년 동안 한나라 5만대군이 포위해도 함락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연남생묘지명에는 고조선에 대한 말이 자주 나오고 고조선의 시조가 동명東明이라고 주장하는 등
고조선에 대한 강한 계승적 의식이 보여지므로 굉장히 흥미있는 비문이다.
일단 우리는 패수를 혼강=비류수라고 볼 수 있다고 보고 계속 내용을 전개해보자.


위만은 혼강(비류수=패수)의 동쪽으로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정착한다.
'빈 땅'이라는건 이 곳이 조선의 영토도, 한나라의 영토도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앞서 한나라와 패수를 경계로 하였지만 패수의 동쪽 땅에 조선의 지휘부를 설치하지못했다.
조선은 미천한 세형동검 문화로 철기는 극소수였고 제대로 된 군대 조차 일구지 못했고
한나라 역시 조선이 무서워서 패수를 경계로 한게 아니라 더이상의 마찰은 꺼리고 그냥 주변 종족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 것 뿐이고 조선이 주변 종족들을 대표하여 한나라와 계약을 치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상하장은 어디인가?

당시 고조선의 중심지는 청천강 이남에 있었다. (고고학상 청천강 이남의 세형동검 문화)

그렇다면 위만의 출신이나 그의 종족은 정확히 고고학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요동에서 청천강 이북까지가
명도전,전국시대 연나라 계열 철기를 사용하는 연화보 세죽리 유형 문화가 분포하여있다.
이 문화의 시작은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을 쳐서 청천강 이남으로 몰아내고난 후 부터다.
요동의 연나라 사람인 위만은 한나라의 직접적인 군사적 영향이 요동에까지 미치게되고 그의 주군인 연왕 노관이
흉노로 도망치자 그는 요동을 버리고 살 곳을 찾아 이동한다.






분명 위만은 패수를 '동쪽'으로 건넜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삼국지 동이전 한전 인용 '위략'


그렇다면 상하장은 혼강(패수=비류수)의 동쪽인 졸본,집안 일대다.






위만은 조선의 영역이 아닌 상하장에 거주하며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모으고 세력을 넓히나 상하장은
심히 좁았다. 온통 산 골짜기로 즐비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라곤 찾기가 힘들었다.
이 지역에 도읍했던 고구려가 왜 초기 요동군 현도군을 약탈질을 자주 하고 주변 종족을 약탈 자주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위만은 조선 왕 준에게 항복하고 조선의 서쪽 변방(압록강 이남에서 청천강 이북)에 상하장인들을 거주하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더 끌어 모아서 조선의 부하가 되겠다고 한다.

위만이 상하장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서쪽 변방 영토도 요구한 걸로 보아 상하장은 조선의 서쪽 변방이 아닌
동북방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아무튼 이는 준왕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제안이었다. 한나라가 무서운 준왕으로선 세형동검만으로
한나라의 강한 철기군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한나라가 지금 당장은 급해서 패수를 경계로 했겠지만 조선의 실상이
더 파악되고 동방 열국의 미천하고 한심한 사정들을 알게 되면 태도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테니까.



"(조선 왕) 준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부하가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 인용 '위략'






그렇게하여 위만의 상하장 집단의 영역은 압록강 이남에서 청천강 이북까지 넓혀진다.
준왕은 심히 바보였다. 조선보다 우수한 요동의 연화보 세죽리 문화에서 살던 위만 집단은 세형동검으로 무장한
조선보다는 발달된 전국시대 철기를 가졌고
위만 집단으로서는 상하장으로부터 조선의 서북방 영토에 이르기까지 겨우 수백리 밖에 안되는 영토 안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힘들고 또 저런 약한 조선 밑에 굴복하기도 싫었다. 결국 그 마지막 결정은 쿠데타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 인용 '위략'


왜 준왕은 육로로 도망가지않고 바다로 도망갔을까. 아마 위만 집단은 말을 운용한 빠른 경기병도 보유했을 것 같다. 게다가
군사면에서 상대가 안되기에 도망치다 붙잡힐 수도 있으니까 해로를 선택한 것이다.
해로를 선택했다는 거나 근신,궁인들을 거느리고 배에 탔다는거나 , 한韓으로 제대로 간 걸로 보아 이 당시 고조선은
남한 지역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해양로도 알고 있고, 수군은 아니지만 무역선 정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하여 위만의 영역은 북한 일대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조선족은 침략자 위만에게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저항할 힘은 현재로선 없지만 나중에 힘이 커지면 골칫거리가 되니 이들은
위만의 영역에만 복속시키고 세형동검 주류 문화를일구게 내버려두었다.

위만도 중국 망명자인데다가 위만의 집단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자들로 가득한 이 외부 침략 세력들은
고조선,진번,임둔(옥저)인,낙랑인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침략자에 불과했다.






위만은 원망이 가득한 조선 지역에 도읍을 두지 않고 상하장 근처나 혹은 좀더 멀리이지만 좀 가까운 지역에
도읍을 두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 졸본이나 집안 일대)
하지만 조선 종족들의 불만을 고려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선포하고 수도도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의 이름에서 따온다.

아무튼 요렇게 볼 시 졸본은 '상하장'이 되고 왕검성은 '집안'이 된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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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서 왕검성이 상하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이란 말도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북한 일대는
철기는 극소수이고 철제무기는 거의 없으며 세형동검이 주류인 청동기 문화이기 때문에 이렇게 봐야 옳다.

압록강 이남에서 청천강 이북에 왕검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왕검성같은 한나라에 대항할만한 철옹성같은 요새가
있을만한 곳은 찾아지지 않고 있고 한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 곳보다는 졸본,집안 일대가 가장 적격인 수도다.
만약 압록강 이남에서 청천강 이북에 도읍했다고 보자. 그러면 하늘이 준 천험의 요새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고
압록강 하구에 한나라 수군이 상륙하면 곧 바로 타겟이 되게 마련이다.



집안 일대에 왕검성이 있다는 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로도 쉽게 증명이 가능하다.
고구려 동천왕 당시 환도성(집안)이 위나라 관구검에게 초토화되었을 때 동천왕이 '평양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 곳을 왕검의 옛 터라고 부르고 있다.
동천왕 당시 남쪽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집안 근처에 왕검성이 있다는 것이다.

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피하기위해 수도를 옮겨야하기도하므로 아마도 집안보다 조금 더 동쪽에 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한다.


"21년 봄 2월에 왕(동천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거쳐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평양은 본래 신인 왕검(神人 王儉)의 택지였다.
혹은 이르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김부식이 임의로 넣어 추가했다기보다는 고구려 사관들이 이를 적었고 이런 사료가 김부식에게 입수되었다고보는게
옳다고 본다.


.................



위만이 왕검성(집안)에 도읍할 무렵 패수의 서쪽에는 한나라가 요동에서 세력을 키우고있었다.

위만은 판단이 매우 빨랐다.
한나라의 요동태수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한나라의 바깥 신하(외신外臣)이 되어 동방의 종족들을 다스릴테니
주변 종족들을 잘 다스릴 수 있게 한나라의 병기와 재물을 달라고 하였다.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만(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위만)은 병위(兵威:군사의 위세 즉 병기)
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



당시 한나라는 청동기 중심 체계였던 진나라의 무기 수준을 벗어나 강철 기술이 서서히 발달해가고있었고
군사력도 서서히 강화되고있었다.



"<서한 초기~서한 중기> 한나라 강철 기술의 발달로 무기 체계가 새로 늘어나 군사력이 강화되어감.
새로 제작된 종류의 무기들은 환두도,대도,소도,월,월극,쇄,연,노기,구양,질려,개갑.

철촉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 이전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무장을 갖추게됨. (개갑무사의 출현)
서한 초기부터 문제 시기까지 차츰 발전되어가다 무제 시대에 철기 제작 전성기를 맞이함."

- 이남규 : "낙랑 지역 한대 철제 병기의 보급과 의미 논고 (동북아역사재단 '낙랑문화연구')








위만은 이런 우수한 철기 기술을 얻어서 주변 종족을 빠르게 정복하고 나아가서는 한나라에도 대항할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요동태수가 위만의 친구였나. 아니면 바보였나. 천자에게 위만이 외신이 될 수 있도록 주청하여 천자의 허락을 받고선
위만에게 한나라의 철제 무기,재물까지 주었다.









이렇게하여 위만조선은 진번,임둔까지 복속시켜 수천리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 되었다.







나중에 위만조선은 일부러 한나라의 망명자들을 유인해내기 까지 한다.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사기 조선열전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우수한 철기 기술이 더 빠져 나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한나라 경제 때에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서 한동안 중국대륙이 혼란스러웠고 하마터면 천자의 도성이
오,초나라를 위시한 7국이나 되는 제후 반란군들에게 함락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흉노의 침입으로 한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굉장한 혼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을 피해 달아나는
한나라의 망명자들도 있었을테고 오초칠국 난의 패배로 한나라의 강한 견제에 시달리며 불만을 품는 제후 세력들이나
철기 기술자들이 위만조선의 꼬드김으로 위만조선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이글루스 역밸러 '황룡' 제작 http://dragonfear.egloos.com/





다음 내용은 2편에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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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냠냠이 2012/04/30 19:26 # 삭제 답글

    아, 머리가 혼란스럽네요.

    여지껏 만리장성은
    http://www.shoestring.kr/shoecast/asia/49_great_wall/great_wall.html
    이정도 인줄 알았는데

    올리신 자료와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manchuria&folder=14&list_id=11517017
    자료는 중국이 조작하는 자료 아닌가요?

    만리장성에 대해서 글좀 써주세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1 02:48 #

    중국이 조작한 자료는 절대 아닙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1 02:49 #

    네. 써보도록하겠습니다.
  • 나그네 2012/04/30 19:52 # 삭제 답글

    평양까지 만리장성이?! 한반도에서 만리장성이 발굴된사례는 없는걸로아능뎅...
  • 제홍씨帝鴻氏 2012/05/01 02:49 #

    이미 중국이 발굴하였습니다. '연진장성'이라 불립니다.
  • df 2014/05/03 10:34 # 삭제 답글

    중국이 발굴?? 놀고있냐??
    중국이 일부러 고구려 장성을 만리장성으로 개조해서 둔갑시켜 포함시키는걸 그대로 믿니??
  • ㅇㄹㅇㄹ 2014/05/03 10:36 # 삭제 답글

    지금 동북공정에 날개를 달아주는 글 삭제해라 에휴
    중국인 그전에 북경까지 만리정상이라고 발표하다 동북공정하니 평양까지 늘었네 에휴
  • ㅇㄷ 2019/01/05 05:50 # 삭제 답글

    한반도에서 만리장성 유물이 발굴된 일은 없습니다. 진의 장성은 갈석산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낙랑군은 한대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모용씨가 요서에 설치한 것입니다. 낙랑군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요서로 옮겨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 책사풍후미나모토 2019/01/12 16:59 #

    한반도쪽 만리장성이라는건 그냥 한반도쪽 군현을 보호하는 국경선 목책이라고보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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