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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위만조선사 연구 2편 -한,조 대전쟁 by 제홍씨帝鴻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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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위만조선사 연구 2편 -한,조 대전쟁





자, 그러면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 과정을 살펴봐서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논해보도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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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5만 대군의 진격)









"좌장군 순체는 군사 5만으로 요동에서 출격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그렇다면 이 험준한 곳은 어디일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투는 '패수'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다는 것이 사기 조선 열전에 자주 나오므로 험준한 곳 역시
패수 일대에 있었다고 봄이 맞다. 패수는 이미 혼강(비류수)이라고 앞 글에서 논증하였다.


험준한 곳이란 말만 있고 '성城'이란 표기는 없는 걸로 보아 자연 요새에서 조선군이 한나라군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글에 이미 말한대로 이 곳은 졸본의 오녀산성이거나 그 일대의 어느 산성이다.


(졸본 오녀산성)











좌장군 순체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진다.
위만조선의 군사는 강했다.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산동반도)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이 제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군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
사기 조선열전-






싸움이 졸본의 험준한 곳으로 집중된 사이 산동반도를 출발한 누선장군 양복의 7천 군사가 탄 수군이
압록강 하구에 도착한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을 것인데. 계속 배를 타고 갔다는 말이 없고 "제나라 병사 7천을 거느리고.."
라는 말로 보아 중간에 상륙하여 몰래 군을 이동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누선의 수군의 이런 비밀스런 수군 드랍 공격은 졸본의 험준한 곳으로 위만조선의 군사력이 집중된 틈을 타 왕검성(길림 집안시)
을 치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본래의 전략은 왕검성(길림 집안시) 가까이 가지않고 근처에 포진하여 좌장군을 기다리며 왕검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사기 조선열전-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 서군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사기 조선열전-









그러나 좌장군의 군사가 조선의 패수 서군(西軍)을 뚫지 못해 늦어지자 누선 장군은 공을 급히 다투려는 마음으로 먼저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오히려 기습으로 대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되자 한무제는 짜증이 심히 나서 새로운 비책 카드를 꺼낸다. 그것은 협상 카드였다. 하지만 카드는 떡밥이었다.












일단 한무제는 사신 위산을 위만조선 우거왕에게 보내서 군사의 위세로서 뭐 백만대군이 잇다느니 뭐니로 위세를
보이면서도 또 화친을 제의하여 우거왕을 달래게하였고 우거왕이 알았다하며 태자를 보내 들어가 화친을 하게 했는데.

말 5천과 대량의 군량미를 지닌 5천 기마대로 패수를 건너게했다. 말 5천과 군량미를 바치자는 것이었으나
전쟁 중인 우거왕이 그런 전략을 택한다는건 말이 안되고 말 5천을 바친다는건 상당한 출혈이므로 한나라 군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려는 심산이었다. 우거왕 역시 한무제의 호전적인 성격을 알았는지 둘 다 교활하였다.


그러나 사신과 좌장군 순체가 태자에게 기마대 끌고 오지말라하고 그렇게하여 거짓 협상은 결렬되고
한무제는 빡쳐 위산을 이얍하며 죽인다.










그 후 좌장군 순체가 패수 위의 군사를 끝내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군도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못하여 전쟁 개시 1년 째가 되어갔다.


이렇게 한나라 대군에게 포위당하고도 소수의 군사만으로 오래 버티는 성은 토성이 아니라 험준한 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기록에서 표기되는 이름이 왕險(험)성이 아닌가. 왕! 험한 성.

게다가 사마천 역시 "우거는 험고險固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라고 말하며 왕검성이 험하고 견고하다고
말하였다.





(한나라 5만 대군의 공격에도 끄덕없던 왕험성王險城. 그 성은 사진에서 보이는
오녀산성같이 굉장히 험하고 견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버틴다고 좋은건 아니었다. 위만조선의 남쪽 멀티인 낙랑,진번,임둔이 한나라에게 자진 투항하고
한나라의 문물을 냠냠하며 좋아하고 이를 보는 왕검성의 귀족들은 매우 짜증이 났다. 이 현도 땅에 많은 농토를 둔
자신들만 이 고생이라니!







그래도 계속 버티면 성이 안전하고 한나라도 물러가고 고구려 700년 장엄한 역사를 이미 위만조선 때 이루었을수도있는데.
이 병신같은 조선 귀족들은 자기 농토가 다 뺏겨가서 열받아서 성을 빠져나가 한나라에 투항하고



나중엔 왕검성에 남아있던 소수 귀족이 우거왕을 암살하고 한나라로 튄다.





그런데도 조선 장군 성기가 성민들을 독려하며 맹렬히 저항하고 성문이 열릴 기미를 보이지않자 성 안의 귀족과 조선 왕자가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여니 장군부터 백성들까지 한나라에 투항할 의사가 매우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가 기원전 108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현도,낙랑,진번,임둔 한사군이 조선이 멸망하고 난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 후 한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주요 귀족들은 산동반도로 옮겨져 봉지를 받았다. 봉지를 받는다는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다. 이건 귀족들만 옮겨간게아니라 조선인들도 상당수 옮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의 귀족들은 얼마 안가 토사구팽당하고 봉지를 빼앗겼다. 다 토사구팽이었고 속임수였다.
이렇게 조선 주요 귀족들은 중심지인 왕검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귀양당했고 왕검성이 한나라에 끈질기게
대항한만큼 그 조선 종족에 대해서도 처우는 매우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지역의 완벽한 장악을 위해 한나라로 끌고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낙랑의) 기원전 1세기 목곽묘(낙랑군 설치 이후)의 부장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철제무기,
공구 및 거마구가 주종을 이룬다.
(...) 전체적 유물 양상이 고조선 이래의 재지적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고조선 토착 세력 무덤으로 판단."
"군현 지배 초기의 목곽묘 단계에서는 고조선 이래 전통적인 한국식 동검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
국랍중앙박물관 '낙랑' 도록)

"목곽묘의 조영자는 고조선 단계부터 서북한 각지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를 통할하던 지배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라는 정치적 사변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기반을 해체당하지않고
재지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군 치하인 기원전 1세기에도 여전히 위만조선의 재지적 기반을 유지한채 지배세력들이
존속되었음을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목곽묘라는 분묘의 문화 현상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8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낙랑군의 현성은 토착사회의 취락 중심지를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그러나 낙랑군에서 이런 정황이 고고학적으로 전혀 드러나지않음은 물론 영 상황이 딴판이다.
낙랑의 주요 군장들은 모두 그 지역의 토착 지배가 인정되고 조선 세형동검 주류 문화가 인정되었으며
오히려 군장들은 낙랑군 설치 이후에 한나라의 철기 문물을 받아들여 서서히 청동기 반 철기 반으로
발전해나간다. 그 지역의 토착 문화가 이렇게 많이 배려받았다는건 조선의 주요 귀족들이 산동으로
귀양당하거나 조선인들이 상당수 끌려간 상황, 한나라에 끈질기게 대항하는 위만조선의 모습하고 영~~~~~
딴판이다. 딴판!!!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또 다른 중심지로 추정되는 현도군 일대는 어떨까?
사료와 완벽히 일치한다.



"군현 도성은 현도군에서는 (군현의 중심 토성이) 토착사회와 유리되어 있다. ......
낙랑에서는 (군현의 중심 토성이) 토착사회 위에 형성되어있다 ... 고조선 이래 토착세력의 중심지에 설치되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낙랑에서는 토착민이 지배적이거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반면, 현도의 경우는 토착민의 거주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
토성 주변의 낙랑고분 가운데 이른 시기의 형태인 토광목곽묘(나무곽무덤)의 문화 성격이 고조선 이래 세형동검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 무순 동쪽의 토성 주변에는 한대 고분을 찾기 힘들다.
제1,제2현도군 시기 토성 주변에 한인사회가 정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이겠다.
현도군의 잦은 이치(移置:현도군의 중심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와 열악한 군세는 토착 예맥족의 저항..."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즉 낙랑군은 고고학 발굴 결과 토착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토착민 군장들은 그 지배권을 인정받고 오히려 발달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현도의 경우는 토착민 거주 사실이 명확하지않다는 점은 조선 주요 귀족은 물론 조선인들까지 한나라에
끌려갔다는 걸 증명하며 한인漢人 조차도 제대로 된 정착을 하지 못했음은 예맥족,조선 일부 저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료를 검토하면 이런 정황이 더 증명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고구려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자마자 갑자기 고구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전까지 고구려란 이름은
등장하지않는데. 갑자기 등장한다. 고구려는 위만조선에 지배를 받는 예맥족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갑자기
고구려란 타이틀을 걸고와서 현도군에 대항한다.
위만조선인들이 거의 끌려가버리고 그 남은 자리에 고구려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현도군을
지속적으로 약탈하며 산 골짜기나 오녀산성 요새에 숨어들었고 한무제는 심히 골치가 아파 고구려현을 설치하여
고구려인들을 현도군에 소속하게하고 북,관악기,악공으로 회유하였지만 이 회유책도 결국 실패였다.
그들은 맛있는 것만 쏙 빼가고 계속적으로 약탈을 자행하여 현도군 주변에 한인 사회는 정착되지 못하는 비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고구려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마치 고구려인들이 끌려가자 그 빈 자리를 말갈인들이 차지하여
발해를 세우는 모습과 유사한 것이다..!

결국 현도군은 서북쪽으로 군현을 옮겨 도망치고 만다. 대고구려의 승리였다. 현도군이 물러가고 난 졸본에는
고구려가 완전히 정착하며 한나라에 계속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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