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굔군님이 애써 무시하시는 고고학적인 진실~ 피식~ by 제홍씨帝鴻氏

굔구니의 글에 대한 핑백 ^^



굔군님이 애써 무시하시는 고고학적인 진실~ 피식~



낙랑군이 왕검성이라면 풀리지 않는 문제들















0. 북한 일대에선 한나라와 1년 동안 대항한 철옹성(왕검성)이 전혀 확인되지 않음.



낙랑군 중심지 조선현의 치소治所인 낙랑토성 역시 위만조선의 왕검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


(북한의 평양 낙랑 구역(낙랑군)의 낙랑 토성)


굔군은 고구려가 새 수도 평양성을 설치하는 과정을 거치는 바람에 고조선 고구려 유적이 한데 뒤섞여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낙랑군 일대에 왕검성이 있었다면 응당 왕검성은 세월이 흐르며 흙 속에 파묻혔을 것이고
거기에 평양성을 설치하여 성벽이 파괴된다해도 땅을 파내려가면 왕검성 중심지 문화 유적이 나타나게 되어있으니
굔군의 말은 헛소리이고.

여하튼 북한 일대에서 그런 철옹성이 전혀 확인되지도않고 더군다나 위만조선의 중심지 역시 지금까지 발굴안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강철 무기로 무장한 한나라 5만 대군)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경우는 어떨가. [사기],[한서] 등에 위만조선은 무력을 기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아우르며, 한 제국의 무력에 맞서 1년여 동안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기반을 갖춘
국가체로 묘사되어있다. 정황으로는 발달된 철기 문화를 영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서북한 지역에서는 앞서 문헌에서 보여주는 위만조선의 실체를 웅변할만한 대규모 유적이
조사된 예는 없다."
-4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1. 고고학적으로는 낙랑군 일대가 절대 왕검성일 수 없음.



문헌을 파악해볼 때 위만조선은 철제무기에 기반하여 수천리를 정복한 강력한 정복국가이며
강철무기로 무장한 한나라 5만대군에 맞서 1년을 싸운 강력한 국가엿다.



"<서한 초기~서한 중기> 한나라 강철 기술의 발달로 무기 체계가 새로 늘어나 군사력이 강화되어감.
새로 제작된 종류의 무기들은 환두도,대도,소도,월,월극,쇄,연,노기,구양,질려,개갑.

철촉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 이전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무장을 갖추게됨. (개갑무사의 출현)
서한 초기부터 문제 시기까지 차츰 발전되어가다 무제 시대에 철기 제작 전성기를 맞이함."

- 이남규 : "낙랑 지역 한대 철제 병기의 보급과 의미 논고 (동북아역사재단 '낙랑문화연구')




(강철 무기로 무장한 한나라 5만 대군)






그러나 평안도(낙랑)에선 위만조선 시기에도 여전히 세형동검문화가 주류였다.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되는건
기원전 1세기 낙랑군 설치 이후에서야 가능하게되었다.

즉 청천강 이남에선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까지는 청동기가 주류이지. 철기는 소수에
불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인 기원전 1세기 시점에서야 청천강 이남에선 목곽묘가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한나라의 철기가 청동기를 '조금' 대체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세죽리-연화보 유형에서는 철제 농기구 및 병기가 많이 제작되고,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견되며
무엇보다도 세형동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도 바로 전시기인 기원전 5~4세기에서는
윤가촌 등에서 세형동검이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의 영향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세형동검이 발달되어서 남한의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펼쳐지고
토광묘가 발달한다. 그러나 세죽리-연화보와는 달리 명도전이 발견되지 않으며.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청천강 이남은) 철기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장품에서는 청동장식이나 세형동검,차마구 등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철기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는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
-이형구 엮음 단군조선에 대한 남북한 학자들의 학술발표 논문집 '단군과 고조선'
최몽룡 교수의 기고논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 위만조선' 중에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단계가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 고조선 이래의
문화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 당시 지배 세력의 주 묘제는 여전히 세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54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낙랑인들은 청동기 중심 문화로 철제무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 청천강 이북 지역에 분포하는 위원군 용연동 유적,영변군 세죽리 유적 등에서
철제의 모(?),과(戈),鏃(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원전 2세기의 서북한(낙랑)의 유적들에서는 철제 무기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적석목관묘 계통 분묘에는 다수의 청동기와 함께 겨우 주초철부가 1점 정도 부장되어 있는데
불과하다.
- 이남규 : "낙랑 지역 한대 철제 병기의 보급과 의미 논고 (동북아역사재단 '낙랑문화연구')



평안도가 위만조선의 중심지라는건 고고학을 무시한 개드립이다.




게다가 한서 지리지에서의 낙랑군 설치 이전 낙랑인들의 모습은 법은 8개 밖에 없고
평화로이 살아가는 시골인들의 모습으로 철기 정복국가 위만조선의 모습을 반영하지못하고 있다.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 설치 이후에 한나라의 문물,한나라 사람이 대거 들어오면서 낙랑의 법이 60개로 늘어나고
매우 사회가 각박해졌다고한다.


"낙랑조선의 백성에게는 범금 8조가 있어 .... 이 때문에 그 백성은 끝내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아
집문을 닫는 일이 없고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함이 없었다. (...) 군郡이 처음 설치될 때 관리를 요동에서 선발하였는데
관리들은 백성들이 재물을 훔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밤에 도적질을 하니
그 풍속이 조금씩 각박해져 지금은 그 범금이 60여조에 이른다."
-한서지리지 하下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한 글로 써볼 생각이다. 낙랑 토기의 형성에 대해서 말이다.





2.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1년 동안 전쟁을 치루고 우거왕이 살해당하고 조선의 귀족들이 한나라에
투항해도 장군 성기가 끝까지 한나라에 투쟁하며 성문을 열어주지않다가 우거의 아들 장각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성기를 죽인 후에야 성문이 열어졌다는 점은 위만조선이 그만큼 한나라에 강력한 저항을 하고
조선의 주요 귀족들은 성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였다.

그 후 한나라에 항복한 조선의 주요 귀족들은 산동반도로 옮겨져 봉지를 받았다. 봉지를 받는다는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다. 이건 귀족들만 옮겨간게아니라 조선인들도 상당수 옮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의 귀족들은 얼마 안가 토사구팽당하고 봉지를 빼앗겼다. 다 토사구팽이었고 속임수였다.
이렇게 조선 주요 귀족들은 중심지인 왕검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귀양당했고 왕검성이 한나라에 끈질기게
대항한만큼 그 조선 종족에 대해서도 처우는 매우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지역의 완벽한 장악을 위해 한나라로 끌고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낙랑의) 기원전 1세기 목곽묘(낙랑군 설치 이후)의 부장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철제무기,
공구 및 거마구가 주종을 이룬다.
(...) 전체적 유물 양상이 고조선 이래의 재지적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고조선 토착 세력 무덤으로 판단."
"군현 지배 초기의 목곽묘 단계에서는 고조선 이래 전통적인 한국식 동검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
국랍중앙박물관 '낙랑' 도록)

"목곽묘의 조영자는 고조선 단계부터 서북한 각지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를 통할하던 지배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라는 정치적 사변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 기반을 해체당하지않고
재지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군 치하인 기원전 1세기에도 여전히 위만조선의 재지적 기반을 유지한채 지배세력들이
존속되었음을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목곽묘라는 분묘의 문화 현상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85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낙랑군의 현성은 토착사회의 취락 중심지를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그러나 낙랑군에서 이런 정황이 고고학적으로 전혀 드러나지않음은 물론 영 상황이 딴판이다.
낙랑의 주요 군장들은 모두 그 지역의 토착 지배가 인정되고 조선 세형동검 주류 문화가 인정되었으며
오히려 군장들은 낙랑군 설치 이후에 한나라의 철기 문물을 받아들여 서서히 청동기 반 철기 반으로
발전해나간다. 그 지역의 토착 문화가 이렇게 많이 배려받았다는건 조선의 주요 귀족들이 산동으로
귀양당하거나 조선인들이 상당수 끌려간 상황, 한나라에 끈질기게 대항하는 위만조선의 모습하고 영~~~~~
딴판이다. 딴판!!!


그렇다면 위만조선의 또 다른 중심지로 추정되는 현도군 일대는 어떨까?
사료와 완벽히 일치한다.



"군현 도성은 현도군에서는 (군현의 중심 토성이) 토착사회와 유리되어 있다. ......
낙랑에서는 (군현의 중심 토성이) 토착사회 위에 형성되어있다 ... 고조선 이래 토착세력의 중심지에 설치되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낙랑에서는 토착민이 지배적이거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반면, 현도의 경우는 토착민의 거주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
토성 주변의 낙랑고분 가운데 이른 시기의 형태인 토광목곽묘(나무곽무덤)의 문화 성격이 고조선 이래 세형동검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 무순 동쪽의 토성 주변에는 한대 고분을 찾기 힘들다.
제1,제2현도군 시기 토성 주변에 한인사회가 정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이겠다.
현도군의 잦은 이치(移置:현도군의 중심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와 열악한 군세는 토착 예맥족의 저항..."

-동북아역사재단의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 실린 운용구의 논고


즉 낙랑군은 고고학 발굴 결과 토착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토착민 군장들은 그 지배권을 인정받고 오히려 발달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현도의 경우는 토착민 거주 사실이 명확하지않다는 점은 조선 주요 귀족은 물론 조선인들까지 한나라에
끌려갔다는 걸 증명하며 한인漢人 조차도 제대로 된 정착을 하지 못했음은 예맥족,조선 일부 저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료를 검토하면 이런 정황이 더 증명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고구려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자마자 갑자기 고구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전까지 고구려란 이름은
등장하지않는데. 갑자기 등장한다. 고구려는 위만조선에 지배를 받는 예맥족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갑자기
고구려란 타이틀을 걸고와서 현도군에 대항한다.
위만조선인들이 거의 끌려가버리고 그 남은 자리에 고구려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현도군을
지속적으로 약탈하며 산 골짜기나 오녀산성 요새에 숨어들었고 한무제는 심히 골치가 아파 고구려현을 설치하여
고구려인들을 현도군에 소속하게하고 북,관악기,악공으로 회유하였지만 이 회유책도 결국 실패였다.
그들은 맛있는 것만 쏙 빼가고 계속적으로 약탈을 자행하여 현도군 주변에 한인 사회는 정착되지 못하는 비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고구려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마치 고구려인들이 끌려가자 그 빈 자리를 말갈인들이 차지하여
발해를 세우는 모습과 유사한 것이다..!





3. 왕검성 = 낙랑군 인식은 서진-남북조 시대 혹은 그 이후에야 등장하게 된 것.

전한,후한을 통틀어 평양 일대가 왕검성 수도라는 인식도 전혀 없었다.
왕검성 = 낙랑군 인식은 서진-남북조 시대 혹은 그 이후에야 등장하게 된 것이다.

http://ragwangfal.egloos.com/1680662 참조




4. 북한 일대 낙랑의 중심 세력은 위만조선 당시에도 여전히 낙랑,조선인의 토착세력이었다.
사료에서 위만조선의 중심 세력이 중국 망명자 집단이었다는 것과는 전혀 반대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만조선 단계가 세형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 고조선 이래의
문화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 당시 지배 세력의 주 묘제는 여전히 세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54p 오영찬의 낙랑군 연구




(기원전 1세기 낙랑 일대 군장 무덤들 출토 상황. 죄다 청동기임. ^.^)




상황이 이러한데도 굔군은 낙랑군이 왕검성이라고 벌써부터 단정을 내린다. 얘는 역사를 공부하지말아야된다고 본다.





이상 무식한 아이 참수 논파 완료!









* 새벽 동안 글 다섯개 가볍게 썼더니 피곤하네 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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