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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님.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왜倭입니다. by 제홍씨帝鴻氏

블레이드라는 어떤 빈 수레의 글 링크







                               (갑옷으로 중무장한 5세기 야마토의 소년 수장)





블레이드님.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왜倭입니다.











블레이드씨는 말했습니다.

"필자의 포스팅에서 드라마 광개토태왕의 내용을 문제삼았던 점은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자신들이 지배하는 거점을 가지고 신라를 괴롭힌 것처럼 묘사했던 장면이다.
드라마에서는 “광개토태왕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해서”라고 나레이션을 깔면서도
정작 가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왜가 백제나 가야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거점이 있었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블레이드님께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준 장면)





즉 블레이드님의 말은 "나의 가야는 어디다 쳐박아두고 왜가 뭐 다 하는 것처럼 나오냐? "
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건 광개토태왕비를 제대로 보지못한 블레이드님의 수준 낮은 소견일 뿐이지요.










"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광개토태왕비

"特遣使還, 告以密計.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신라 사신을 특별히 돌려보내며 비밀계획을 말했다. "
-광개토태왕비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10년 경자(서기 400년)에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광개토태왕비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
왜의 배후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은 즉각 항복하여 라인羅人으로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과 염성을 장악하여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성안의"
-광개토태왕비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其□□□□□□□言
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라인羅人으로 수성하게 했다. 신라성......

"□□且□□□□□□□□□□□□□□□□□□□□□□□辭□□□出□□□□□□□殘倭潰(逃;2행)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광개토태왕비


"逃. 拔□城,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
□성을 탈취하여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 전에 신라 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조공청명함이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이사금은... 복구를..."
-광개토태왕비









자, 이 태왕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건



1. 서기 400년 신라를 공격하던 병사는 가야는 없고 왜倭만 있음.

2. 당시 신라는 왜倭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음.

3. 왜군의 군사 주둔지 혹은 병영이 임나가라에 있음.

4. 서기 400년 고구려가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부산 복천동고분군)을 장악하고 라인羅人(가라인)으로 지키게함.

5. 고구려에게 염성(김해 대성동고분군)이 장악당해 왜구가 크게 무너짐.

6. 라인羅人(가라인) 10분의 9가 (일본열도 본토로) 도망치는 왜倭를 따라가기를 거절함.
고구려는 염성(김해대성동고분군)과 신라성(?)을 라인羅人(가라인)으로 지키게함.

7. 그 후의 글자는 지워진 글자가 너무 많아 알기 힘드나 고구려가 또 왜倭하고 싸워서 왜倭가 아주 박살이 남.
이번엔 라인羅人이 아닌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함.



(야마토 군대)



(임나가라의 중심지 김해대성동고분군)





(김해 금관가야=임나가야)




자. 기록을 자세히 보면 공격의 주체는 왜倭이고 왜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지역은 임나가라이구요.
그렇다면 당연히 왜군의 군사 병영들이 있을테니 왜군의 한반도 거점은 맞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태왕비에서 가라인은 공격의 주체로든 뭐로든 등장하지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왜를 격파해서 성을 장악할 때마다 라인羅人 즉 가라인으로 지키게합니다.
즉 고구려가 왜를 격파하기전에 라인은 성의 수비를 맡지않았다는 것이고 왜倭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 군사가 이르자 가라인들은 즉각 환영하여 항복하고 왜倭를 거부합니다. 10분의 9가 왜를 거부할 정도로
굉장히 왜를 싫어하는 걸로 나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가라인들이 왜에게 지배를 당하다가 고구려 군대가 이르자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중요한 점은 고구려는 가라를 '적국'으로 보고있지않다는겁니다. 백제는 백잔이라 부르고 왜는 왜적이라고
부르는데 말이죠.


블레이드 씨는 임나가라 혹은 가라(가야) 연맹이 신라를 치기위해서 왜를 군사 용병으로 끌어들여서
신라를 치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블레이드(이희진) 씨의 저서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참고)

하지만 태왕비는 그런걸 전혀 말하지않는다는거죠.


그렇다면 태왕비는 왜 이렇게 기록하는걸까요? 그 이유는....,


"百殘, 新羅, 舊是屬民,백잔(=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南;10행),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ㅁㅁ,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광개토태왕비



자, 이건 모두 다 아는 구절입니다. 왜倭가 짱. 백잔(백제),ㅁㅁ,신라가 왜에게 격파된 꼬봉이라는거죠.

이 ㅁㅁ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가라'가 들어가야 딱 맞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파낸거같지만
아무튼 태왕비는 가라가 왜에게 격파당해 신민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왕비가 왜 왜군을 격파하여 성을 점령할때마다 가라인으로 지키게하고 가라인은 왜 그리 쉽게 고구려에
항복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ㅁㅁ이 임나가 아니라 '가라'이면, '임나가라'는 도대체 뭘까요?


'임나'란 말 자체가 서기 4세기에야 등장하는 말이란건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고
서기 5세기에 임나란 용어가 사용된건 광개토태왕비,중국 남조 사서를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서기 3세기까지는 가야 지역은 '구야(가야)'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서기 4세기에 들어 갑자기 '임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를 열도 중심의 야마토 정부가 김해로 진출하여 가라 열국을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한거라
보고 있습니다. 임나가라 = 임나일본부라는거죠.
일본서기는 그 연대를 서기 249년으로 적고 있는데. 여기에 120년을 더하는 이주갑 인상인지 뭐니하는 법칙에 따르면
서기 369년이 되어 백제의 근초고왕의 남정 시기와 공교롭게 일치하게되죠.


블레이드 씨는 이를 백제의 근초고왕이 가라의 탁순국을 통해 야마토 정부와 교류하여 야마토 정부의 용병을
끌어들여 백제가 가라 7국을 무력으로 위압하며 항복시키고 백제의 연합 체제에 포함시키고 유럽에 미국이 설치한
나토같은 기관을 김해에 백제가 설치한걸 '임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마토의 대사관을 하나쯤 만들어준걸
'임나일본부'의 실상이라고 판단하고있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서기 3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서기 5세기 전반에 건축이 중단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임나가라의 왕릉 무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백제 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찾아보기 힘드며 백제 토기든 백제 문화의 어떤
영향이든 그런 유물은 발견되지도않습니다.
임나를 근초고왕이 세웠다느니 가야에 백제의 영향이 깊이 들어갔다느니 하는건 일본서기를 이용한 블레이드님의 망상에 불과하며
일본서기 조차도 야마토가 임나를 세웠다고하지. 백제가 임나를 세웠다는 말은 하지도 않습니다.

또 블레이드 씨는 자신의 저서 '근초고왕을 고백하다'에서 야마토가 임나를 통해 백제와 밀접한 교류를 이미
근초고왕 시기에 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일본열도의 규슈든 야마토든 후쿠오카든 간에
4세기에 교류의 주체는 임나가야이지. 백제가 아닙니다. 백제는 칠지도 딸랑 하나 보낸게 전부구요. 실제적인 교류를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5세기 후엽에 가서야 영산강 전방후원분을 매개로 해서 백제와 야마토와의 교류가
있기 전까지는 5세기 전반에 신라가 열도와의 교류를 주도하고 그 후 5세기 중엽에 대가야가 교류를 주도합니다.



(임나가라의 중심지 김해대성동고분군)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수장(즉 왕王)이 묻힌 무덤에는 야마토의 수장이 사용하는 파형동기,통형동기가 다량으로 부장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야마토 정부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아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이 시기 야마토는 임나가라로부터 많은 철정을 수입하여 투구,갑옷,칼,방패 등을 제작했고 임나가라,야마토 둘의 무기,갑옷
체계는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성립 시기도 서기 3세기 중반에 성립되어 서기 4세기 전반에 수장급 무덤 단계에 돌입하는 것을
볼 때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성립 연대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인 사실에 대해 어느정도 추정을 해보면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커맨드센터(본진).
야마토는 멀티로 볼 수 있고 혹은 둘이 매우 밀접한 동맹 관계라고 볼 수 있겠는데. 서로 혈연적인 교류를 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합니다.


(5세기 야마토 수장의 토용)



임나의 중심지 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 북방기마민족의 호형대구,동복(청동솥),북방의 순장풍습,
대성동고분군의 마구(재갈 등)가 요서의 선비,부여족의 라마동 고분군의 재갈과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볼 때
임나는 북방 기마민족이 세운 것입니다.(선비족과 혼혈한 부여족)


김해대성동고분군은 갑옷,기병으로 무장하였으며 호형대구,동복,순장풍습을 쓰는 북방기마민족으로
3세기 중반까지 김해를 지배하던 토착 문화인 양동리문화(구야국 혹은 구야가라 혹은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이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10분 만에 작성한 역사 지도 :라마동 고분 집단(임나)의 이동 경로>




당대 광개토태왕비는 이를 "왜倭가 가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판단하였고 한반도에서의 왜의 본거지를
'임나가라'라고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왜구의 중심 도성을 '염성'이라고 파악하였습니다.

이 염성은 임나가라의 중심지인 김해 대성동고분군 근처의 산성으로 추정됩니다.


왜 염성이 김해 대성동 일대냐? 그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략에서 한반도 남부에서 낙랑과 중심적인 교류를
하는 '염사국'의 '염사치'가 나오는데. 학계는 이 '염사'를 임나의 전신前身이라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태왕비가 염성이 고구려에게 점령될 때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라고 하지. '가라가 크게 무너졌다'
라거나 '임나가 크게 무너졌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왜倭의 본거지가 임나라고 불렸고 가라는 왜에게 식민통치 당했으며
왜구의 수도인 염성(김해 대성동)이 광개토에게 점령당해 왜구가 크게 궤멸했고 가라인들은 피해를 입지않았다는
것입니다.

광개토에게 임나가라(왜倭)가 크게 격파당하는 서기 400년. 고고학적으로 5세기 전반 즉 서기 400년과 근접한 시기에
임나가라의 중심지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이 축조 중단됩니다.

그리고 5세기에 일본열도에선 서서히 야마토를 중심으로 통일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여 강력한 왕조가 등장하여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고 왜倭 5왕이 등장합니다.
이 때 왜는 더이상 임나가라의 철정을 수입할 필요도 없이 자기들 스스로 철기를 생산하고 가라의 도질토기도
자신들 스스로 만듭니다.

5세기 야마토 전방후원분의 주인공들인 왜倭 5왕이 중국 남조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임나가 자신들의 본래 영토라고
주장했다는 송서,남제서 등의 기록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합니다.
즉 5세기 야마토 전방후원분의 주인공들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주인공들이었고 광개토에게 격파당해 바다를 건너
멀티인 야마토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말했으니 블레이드님의 주장은 충분히 논파되었군요.




그러면 광개토태왕비에서 왜에 대해 말하는 나머지 부분에 대해 해독해봅시다.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其□□□□□□□言
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라인羅人으로 수성하게 했다. 신라성......

"□□且□□□□□□□□□□□□□□□□□□□□□□□辭□□□出□□□□□□□殘倭潰(逃;2행)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광개토태왕비


"逃. 拔□城,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
□성을 탈취하여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 전에 신라 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조공청명함이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이사금은... 복구를..."
-광개토태왕비



6. 라인羅人(가라인) 10분의 9가 (일본열도 본토로) 도망치는 왜倭를 따라가기를 거절함.
고구려는 염성과 신라성을 라인羅人(가라인)으로 지키게함.

7. 그 후의 글자는 지워진 글자가 너무 많아 알기 힘드나 고구려가 또 왜倭하고 싸워서 왜倭가 아주 박살이 남.
이번엔 라인羅人이 아닌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함.



왜의 임나중심지 염성(김해 대성동)이 장악당하자 왜군들은 본토로 도망치는데. 식민지배당하던 가라인들은
10분의 9가 따라가지않습니다.
고구려는 김해 대성동 일대를 가라인들이 지키게하고 그 후에는 지워진 글자가 너무 많은데.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면 이걸 금방 확인 가능합니다.


5세기 전반 김해대성동고분군이 몰락하는 동시에 임나가라 종발성 지역인 부산복천동고분군은 고구려계 갑주,마갑의
영향을 받은 신라 문물로 대체됩니다.
일본열도에서는 임나가야 문물을 대체하는 신라 문물이 도배를 하게 됩니다.
아주 야마토에도 신라 문물의 영향이 크게 미치게되는 대사태가 일어납니다.
일본열도에 유입된 신라 문물은 철정,장신구,마구,무기,무구,토기류에서 방대하게 유입되는데.
특히 마구,무기,갑옷 등은 고구려계의 영향이 배여있습니다.


"문헌사학의 신라와 왜의 교섭에 대한 (...) 연구는 신라와 왜의 관계가 시종일관 적대적으로 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 주목되나 다만 그 시기가 6세기 후반에 국한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5세기 전반에도 문헌사료 뿐만 아니라 신라와 왜의 관계를 보여주는 고고자료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 오다 후지오는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신라문물에 대한 정리를 하였다. 아즈마 우시오는
4~6세기의 일본열도 출토
장신구,무기,무구,마구 가운데 고구려,신라계의 존재를 지적하였다.
(...) 치가 히사시의 연구에 의해 종래 막연하게 가야,백제계로 파악되어온 일본열도의 마구 가운데
상당수가 신라계임이
밝혀졌다. (...) 5세기 전반과 6세기 후반에 신라 문물이 활발하게 이입되는 시기가 5세기 전반 금관가야 쇠퇴 후이다."
-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박천수 지음-

"이제까지 가야산으로 파악되어온 5세기 전반 일본열도의 철정과 그 계통에 대해 논의되어온 금동제 장신구와
마구가 신라산인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시기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천마총,신라의 왕릉급 무덤에 부장된 금관과
금제 대장식구에 부착된 경옥제 곡옥이 일본열도 니카타현 이토이가와산임을 밝히고자한다."
-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박천수 지음-


""철정이 4세기까지 (일본열도에) 김해지역에서 공급되다가 5세기 전반 그 공급지가 신라로 바뀐다."
-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박천수 지음-


신라를 공격하던 야마토가 그들의 한반도 기지가 파괴되고 갑자기 신라 문물의 홍수에 휩쓸리는 현상을
뭐라 해석해야할까?
신라인들이 말갑옷을 입히고 자신들은 갑주로 무장한채 열도에 상륙한 것을 뭐라 해석해야할까?














그것이 태왕비에 있습니다.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其□□□□□□□言
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라인羅人으로 수성하게 했다. 신라성......

"□□且□□□□□□□□□□□□□□□□□□□□□□□辭□□□出□□□□□□□殘倭潰(逃;2행)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광개토태왕비


"逃. 拔□城,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句
□성을 탈취하여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 전에 신라 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조공청명함이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이사금은... 복구를..."
-광개토태왕비


쉽게 말하자면 지워진 이 수많은 글자들은 고구려군이 신라와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가서 왜를
아주 박살을 내는 장면들이고
누군가가 이를 고의로 지운 것이며
이런걸 알 수 있는 구절이 "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했다."라는 문장. 즉 왜는 지금 본토로
도망하고있고 가라인들은 왜를 따라가지않는다는 점.
그리고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라는 구절과 실제 고고학적으로 일본열도가 후쿠오카에서 야마토에
이르기까지 신라 문물에 지배당하고있고 금관가야 문물들이 사라져버렷다는 점.
시기가 똑같은 5세기 전반이란 점은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고 뒷받침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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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임나와 가라(가야)는 다름.

2. 서기 3세기 중반에 북방 기마민족인(선비족과 혼혈한 부여족) 임나가 요서의 라마동고분군을 떠나
가라를 정복하고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축조함. 임나의 일부 세력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여 열도에 야마토 멀티 기지를 세움.
서기 4세기 전반에 임나가 왕릉 축조도 하며 상당히 발전함.

3. 임나의 중심지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수장 무덤에서 야마토의 수장이 쓰는 파형동기,통형동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므로
임나는 왜倭와 상당한 혈연적인 연관성까지 포함하여 매우 밀접한 관계임.

4. 이로 인해 당대 고구려는 임나와 왜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였음. 그리고 가라는 왜에 식민통치당하는
존재로 인식하였음(광개토태왕비)

5. 임나의 중심지인 김해대성동고분군은 '염성'으로 불리고 임나의 부산 멀티인 복천동고분군은 '종발성'으로 불림.

6. 야마토 군사들은 야마토 수장의 명을 받아 본진 임나를 지키기위해 군사를 파병하여 대규모 야마토 군사들이
임나 염성과 종발성에 주둔함.

7. 서기 5세기 전반 야마토 군사들은 염성,종발성을 본거지로 하여 수시로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도성을 크게 위협하고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음.

8. 서기 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 수도 금성(경주)을 포위한 왜군을 물리치고
임나왜군의 종발성(부산 복천동고분군)까지 추격함. 종발성의 가라인들이 고구려를 환영하며 항복함. 가라인들을 식민지배
상태에서 풀어주고 가라인들이 종발성을 지키게함.
고구려군은 계속 진격하여 임나왜군의 중심지 염성(김해 대성동고분군)과 신라성을 함락시키고 왜구를 크게 궤멸시킴.

왜의 본진인 임나가 멸망. 김해대성동고분군이 축조가 중단됨.

왜구들이 본토로 도망하나 식민지배당하던 가라인들 10분의 9가 왜구를 따라 열도로 가길 반대.
가라인들을 식민지배상태에서 풀어준 고구려는 가라인들로 염성,신라성을 지키게하고 신라군과 함께 바다 건너
열도로 배타고 가서 왜를 계속 박살내서 일본열도에 신라 문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임나의 문물 유입이 영원히 중단됨.


9. 블레이드의 망상 속에서 야마토는 근초고왕 당시 백제와 밀접한 교류를 했지만
실제 고고학적인 사실은 3~4세기에 백제와 야마토의 교류 따윈 전혀 없었고 칠지도 딱 한 자루에 불과하며
교류의 주체는 임나임.
블레이드는 가라 7국을 근초고왕이 정복하고 임나를 근초고왕이 세웠다고하지만 3세기 중반 조성되어
5세기 전반에 끝나는 김해대성동고분군의 출토 결과 백제 유물은 거의 없고 백제 문물의 큰 영향 , 중간 영향이라도
찾아볼 수가 없음. 백제와 야마토가 교류하게되는건 5세기 후엽 영산강전방후원분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게됨.
5세기 전반은 신라가 교류 주도, 5세기 중반은 대가야가 교류를 주도함.




















핑백

덧글

  • 황룡 2012/05/02 01:25 # 답글

    광개토왕에서 왜왕의 뒤에 욱일승천기는 뭘까? ㅋㅋㅋㅋ 열등감 분출인가?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01:31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01:31 #

    욱일승천기 문양은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도 나오지. 내 내일 올리도록하지. 허허
  • BlackNovelist 2012/05/06 20:24 # 답글

    저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其□□□□□□□言 라는 부분 있잖아요

    누가 판독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학자마다 광개토왕비문을 다르게 판독하다보니..
  • 제홍씨帝鴻氏 2012/05/06 21:58 #

    초록불의 해석문입니다. 초록불의 잡학다식 이글루스 블로그 참조
  • 무식한제홍씨 2012/09/23 20:11 # 삭제 답글

    당시에 일본에 있는 왜는 원시부족으로..아무 힘이 없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임라가 왜 의 거점이 아니라. 왜의 본부였다가 .. 나중에 신라백제에 퇴각에 일본으로 도망쳐 ..야마토라는 부족국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도 왜는 별 힘이 없었습니다. 일본역사가 왜곡하고 있는것은 .. 이런것과 같은 황당한 얘기입니다. 미국사람들이 "미국 조상들이 옛날에 유럽을 지배했었다" 이렇게 말하는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사실은 미국의 조상들은 유럽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을 건설했다.. 가 맞는말입니다. 황당한 사기는 그만치시고.. 고대사 왜의 위치나.. 한사군의 위치 등을 명확하게 풀어야 실마리가 나옵니다.. 엉터리 식민사관에 놀아나는 대한민국역사..
  • 제홍씨책사풍후 2012/09/26 21:20 #

    3세기에 이미 일본은 여러 호족 연맹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야마토가 가장 셋고 군사력도 잇엇어요. 무슨 힘도 없는 야만인?
    모르면 말을 하지맙시다.
  • 환단고기 2012/10/12 21:39 # 삭제 답글

    그시대에는 야요이시대라고 막 농사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부족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성장치 못했죠 왜냐 그들은 신석기(조몬)시대를 이은 시대로 돌을 갈아 무기,농기구,장신구를 제작 하였죠 하지만 신라는 본래 사대주의에빠진 나약한민족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군사력이 매우약해 돌로만든 무기로도 이길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상륙하여 신라를 마주잡이로 약탈하고 방화하였습니다 그결과 신라는 고구려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예(왜)를 내쫓습니다
  • 빈빈빙 2013/01/28 19:20 # 삭제 답글

    6세기까지 제련소도 없어서 금속기를 전부 외부유입에 의존해야했던 고대일본이 가야를 식민지화?ㅋㅋㅋㅋ이래서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거다 잘모르는 얼탱이들 데리고 정신승리하지말고 자중해라.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은 설이 분분해서 일본학자들도 저걸 논거로 삼진 않는다. 임나일본부설은 한알사학계에서도 폐기된지가 언젠제...ㅡㅡ 어떻게든 일본고대문명이 내부적으로 자생했다는 주장을 지키고싶은 모양인데 청동기연대도 따로없는 일본은 반드시 문명발상근거가 외부유입형태일수밖에 없다. 김해에서 출토되는 파형동기연대가 일본갓보다 두세기이상 앞서는건 알고있냐?ㅡㅡㅉㅉ
  • 빈빈빙 2013/01/28 19:22 # 삭제

    오타좀있네 미안
  • 독립적인 북극의눈물 2013/08/18 16:05 # 답글

    광개토 비문에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맞습니다.
    왜가 바다를 건너다[도해] 라고 했지 <바다를 건너왔다>라고 는 하지 않았습니다.
    정황상 왜가 임나를 거점지역으로 삼은 건 맞지만 왜가 야마토인가에 대해선 좀더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걸 이해 하려면 요동의 5호16국을 이해 하여야 합니다.
    당시 요동은 수시로 나라가 일어났다 망했다 하면서 전쟁이 한창이였습니다.
    그 무리중 부여족이 있는데 이부여족중 일부가 한반도로 유입이 되는 과정이 4~5세기 입니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이 344년에 요동에 있는 낙랑에서 왕위에 즉위해서 20년만인 363년에 한성으로 돌아옵니다.
    이때가 364년 경이고요..

    이 부여족 무리중 다른 무리는 4세기 초에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금관가야의 도움으로 그곳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같은 부여족인 근초고왕과 왜가 힘을 합해 369년 전라도의 마한과 가야를 정복하게 되는 것이죠
    이중에 전라도는 백제가 가야는 왜가 차자하면서.. 왜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왜는 가야지방의 풍족한 철기덕분에 무기를 만들어 주변국을 차츰 위협하게 되는 것이죠.
    왜라는 명칭은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배를 타고 이동하는 무리를 주로 왜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는 중국남쪽에 문신하며 사는 사람들이 일본이나 한반도 남부에 표류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왜라고 부른 것이죠

    따라서 부여족이 요동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해안가에 출몰하고 있으니 이를 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암틍 이 왜라는 세력이 김해지역에서 세력을 길러 차츰 가야와 신라 백제 심지어 일본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여 압박해 가는 과정이 369년 부터 391녀까지 대략 20년동안에 무지 성장을 하게 되는 거죠.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가 남하하여 왜를 무찌르는 과정이 광개토 비문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광개토는 이 왜를 섬멸하기 위해 모두 3번의 공격을 가하는데 5만의 군사로 400년 404년 407년 세차례 공격을 가합니다
    이중 407년 공격은 왜에 있어서도 참살 탕진 당할 만큼 큰 타격을 입게 되어 당시 거주하고 있던 임나에 있지 못하고 배를 타고 일본 야마토로 가게 되죠..

    이때 부터 왜를 야마토라 부룰수 있지만 그 이전까지는 야마토라 부르기는 애매하고 그냥 왜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해 보입니다.
  • 냐온 2014/02/03 15:52 # 삭제 답글

    임나는 대마도로 보는데 말이지요

    임나는 임나지 왜도 아니고 가야도 아니죠
  • 지나가던 과객 2014/10/25 23:55 # 삭제 답글

    애초에 광개토왕릉비에는 추모왕 때부터 동부여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느니,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느니 하는 과장된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기록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거 부터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 금호야인 2018/02/16 15:49 # 삭제 답글

    "임나가라 종발성 까지" 라 썼는데, "종발성" (從拔城)은 성의 명칭이 아님,
    임나가라국 의 "성(城)을 탈취" 했다는 글(문장)임.
    <쫒을종(從) 뻴발(拔) 재성(城)>: <쫒아가 성을 뻼(탈취함)>이다.
  • 책사풍후미나모토 2018/02/19 02:25 #

    초발성을 그런식으로 멸칭으로 바꿔 부른걸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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