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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3대 우거왕의 동부여 정벌 by 제홍씨帝鴻氏

위만조선 3대 우거왕의 동부여 정벌

















"원삭 원년에 예군 남여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서는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와서 소속되자,
무제는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으나 몇 년만에 없애버렸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武帝...彭吳穿 穢貊朝鮮,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漢書/志/卷二十四下 食貨志第四下
무제 때 팽오가 예맥조선으로 통하는 길을 개통하고 창해군을 두었다. 연(燕)과 제(齊)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한서 지 권이십사 하 식화지 제4하


"흉노는 동쪽으로 예맥조선과 접하였다.(東接穢貊朝鮮)" -사기 흉노전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만조선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꾀하던 때 기원전 128년
갑자기 예의 군장 남려가 28만인을 데리고 요동군(遼東郡)에 투항하여오는
대사태가 발생한다.


예의 군장 남려는 28만명이나 데리고 요동군으로 투항한걸로 보아 남려가 위만조선에
통치를 거부,반항하다가 위만조선 우거왕에게 패망해 생긴 일임을 알 수 있다.












한무제 유철은 이에 급히 예의 군장 남려의 본거지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







한무제 유철은 이 창해군을 통해 위만조선에 대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길이 멀고 위만조선이 이를 가만히 보지않았기에 결국 창해군 진출은 실패하였다.


창해군의 위치는 어디일까?



한서는 이를 예맥조선에서 창해군으로 통하는 길을 개통하였다고 적는다.
즉 예맥조선이라는 지역을 뚫어야 창해군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현도군의 초기 중심지와 창해군을 동일시하는 설이 학계에서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현도군의 초기 중심지가
옥저였다는 후한서,삼국지의 기록에 따라 지금의 함흥,함경남도였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한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오랑캐,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국지 위지 동옥저전



그렇다면 창해군이 있던 이 지역에는 위만조선에 반항하며 28만 인구를 데리고있던
제법 강한 세력인 예군 남려가 있던 것인데
.

역사에는 그에 대해서 기록이 너무 별로없어서 그가 예의 군장이고 상당히 강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런데 예군 남려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그 해답이 있다.




고구려는 위만조선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왕들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왕호 '우거'와 비슷한 '위거','우거'를 썼고
고구려의 왕비 부족인 연나부는 연나라 계열 사람들로 성이 우優씨(위씨)이며
위만조선의 왕족이었다.
http://ragwangfal.egloos.com/1680670 참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본기(주몽 본기)를 보면
주몽이 비류수 가에 도착해 졸본(흘승골성)에 도읍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스스로 선인仙人(단군왕검이 선인이라 불림:동천왕본기 참조)의 후손이라 일컫는
비류국 왕 송양과 대결하여 송양을 이겼다.

그 후 주몽은 북옥저,행인국 등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지만 한나라 땅은 티끌 하나 안 건드린다.


이런 고구려 초기 주몽의 영토 확장 모습은 고고학적인 사실하곤 다르다.
고구려 초기에 초기 현도군이 고구려의 침입에 시달려서 서북쪽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볼 때 이런 기록은 납득하기 어렵다.


고로 이 모습은 위만조선의 1대 왕 위만이 고조선 왕 준을 도망치게하고 고조선을 먹었지만
한나라는 치지않고 주변 조선계 소국만 쳐 수천리 영토를 확장시킨 위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위만조선이 3대왕 우거 때에 이르러 망했으니 고구려본기의 제3대왕 대무신왕본기를 보자.
대무신왕과 우거왕은 얼마나 유사할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본기를 보면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과 싸움. 부여가 멸망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요동태수의 군대에 포위당해 위나암성(위씨 나라 바위 성)에서 항전함.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대적하며 낙랑국 사이에 불화를 겪고 낙랑을 점령한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때 한 광무제가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점령하고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위의 사항은 위만조선의 3대 왕 우거왕의 행적과 유사하다.
단재 신채호는 동부여의 위치를 황해도나 강릉으로
추정했다.
기원전 128년에 우거왕에 반항한 '예'의 임금 남려가 있었는데.
그의 왕국은 함경남도 함흥에 있었다. 남려의 왕국은 후대 고구려인들에겐 동부여로 기억되었다.
무려 28만명의 호구 족보를 한나라에 바치고 위만조선에 대항하나 그 대항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우거왕은 한나라 요동군 5만대군의 침공을 받고 한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군 일대를 점령하게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였다는 주몽의 시기로부터 기원전후~1세기 당시
대무신왕 당시에는 벌어지지도않았던 일이다.

왜냐면 중국 정사 동이전들을 살펴보면 대무신왕은 한나라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와서
'하구려' 국호에서 '고구려' 국호로
다시 바뀌어졌을 뿐. 한나라의 요동군과 전쟁을 했다거나 광무제가 수군을 보내
낙랑을 점령한 사건은 중국 정사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또한 삼국지,후한서 부여전에 부여는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하므로
기원전후~1세기 당시 부여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망하거나 큰 타격을 받았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략: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찌기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삼국지 위지 부여전


고로 위의 사건들은 모두 위만조선 당시에 있었던 일과 왕들의 행적을
고구려 초기 왕의 행적에 끼워넣은 고구려 왕실의 사관들의 짓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 그렇다면 예 군장 남려의 왕국이 '동부여'라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었고
대무신왕이 우거왕이 되니까

예군 남려의 종족의 범위는 함경남도에서 함경북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던 것 같고
이는 삼국유사에서 동부여가 동해 바닷가에 있었다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며
단재 신채호가 대무신왕의 동부여 정벌을 위만조선 말기로 봤던건 비록 그가 이런 정황을
잘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법 추리를 잘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기원전 128년 전후 위만조선 3대 왕 우거는 함경남도,함경북도에 걸쳐있던
예 군장 남려의 동부여를 멸망시킨다. 동부여는 위만조선에 복속되어있었지만
속으로는 위만조선에 대한 반기를 품고 있었다.

동부여는 결국 철기 정복 국가 위만조선에게 패망했고 요동군으로 도망치는데.


두만강 동북쪽으로 피난하여 부여 지역으로 들어가 요동군에게 항복한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玉으로 만든 벽,규,찬? 등 여러 대를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先代의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라고 하였다. (...) 그 도장에 예(濊)왕의 도장'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는 예맥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삼국지 위지 부여전



일본 사학자 율월붕신(栗原朋信)은 예 군장 남려에게 한나라에 내린 인장으로
보았다.(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조선전 삼국지 위지 부여전 주석 28번 참조)



부여는 기원전 2세기부터 문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고학적으로 부여는 '예맥 문화의 중심'에 해당한다.

부여의 고고학 문화인 포자연 유형은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송화강 유역의 길림시를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로 한漢나라식 철제 농기구와 토기,널무덤 등을 특징
으로 하는데.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했다는 점이나 한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고고학적인 사실은
예군 남려가 함경도에서 위만조선 우거왕에게 패해 두만강 동북으로 달아나 송화강 길림의
부여 지역에 정착하여 한나라 요동군의 도움으로 다시 세력을 일구어 소위 '예왕濊王'이라
불리며 부여국 혹은 부여 문화의 전신前身을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여준다.









3줄 요약


1. 함경북도,함경남도에 예의 군장 남려가 다스리는 강대한 종족이 있었다.

2. 기원전 128년 남려는 위만조선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두만강 동북으로 달아나 송화강 길림의
부여 지역에 정착하여 한나라 요동군의 도움으로 다시 세력을 일구어 소위 '예왕濊王'이라
불리며 부여국 혹은 부여 문화의 전신前身을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여준다.

3. 한무제 유철은 기원전 128년 남려의 본토인 함경도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위만조선을 통제하려드나
길도 멀고 위만조선의 군사들이 곳곳에서 방해하여 결국 얼마 안가 폐지한다.

4. 삼국사기 고구려 동명성왕(주몽)본기는 위만조선의 초대 왕 위만의 역사와 상당히 유사하며 위만의 역사를
마치 주몽의 역사인 것처럼 차용하였다.

5. 종래 고구려 3대 대무신왕본기에 기록된 대무신왕이 동부여와 전쟁하여 동부여를 멸망 혹은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했다느니
낙랑을 대무신왕이 점령했는데. 한나라 광무제가 수군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재점령했다느니
고구려의 수도 위나암성이 한나라 요동군의 군대에 포위당했다느니하는 기록들은
사학계에서 사실로 받아들이지않았다. 왜냐면 이 시기에 위의 세 가지 일들은 일어난 적이 없고
중국 사서들에서 위의 세 가지 일들은 전혀 확인되지않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편에서 부여는 선대 이래로 적국에게
패망한 적이 없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 기록들은 전설로 취급되어왔다. 하지만 이는 의외로 다른 해답을 주고있다. 그것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본기가
위만조선의 마지막 3대 왕 우거왕 때 일어난 일들을 마치 대무신왕 때 일어난 일들처럼 기록하고있다는 것이다.

동부여는 예군 남려를 말하며 삼국유사에서 동부여가 동해 바닷가에 있다는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광무제가 수군을 보내 낙랑을 점령했다는건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낙랑군 설치와 연결되며 위나암성이 요동군에게
포위된건 .., '위나암성'이란 말은 '위씨 나라의 바위 성'이란 뜻으로 풀이되며 말 그대로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요동군에게 포위됐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된다.











덧글

  • 황룡 2012/05/02 01:03 # 답글

    잘봤네 껄껄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01:06 #

    껄껄껄 고마우이 껄껄껄!!!!
  • 황룡 2012/05/02 01:13 # 답글

    과연 대무신왕의 기록이 거짓이였다니 놀랍구려! 부여가 함경도에 있었다니 껄껄껄껄 대단해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01:30 #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그렇소이다 실로 대단한 남려왕 동부여의 역사이오이다!
  • 황룡 2012/05/02 01:31 # 답글

    스카이프나 오게나 낄낄낄
  • 냠냠이 2012/05/02 03:15 # 삭제 답글

    고등학교때 배운 지식과는 너무 다른 내용이지만

    새로운 내용을 알수록 뇌를 때리는 맛은 정말 좋습니다.

    앞으로도 내용이 충실한 자료로 다가와주세요.

    만리장성이 확실한건 진나라때 모두 세워진게 아니라 차츰 시대에 맞게 변형된거군요.

    저기 관심있는 두만강과 토문강이 문제되고있는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글좀 부탁해도 될까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03:57 #

    ㅎㅎ 네. 감사합니다. 네. 새로운 글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전 잘 모릅니다.
  • 마에스트로 2012/05/02 12:37 # 답글

    답보 상태에 있던 고조선, 초기 고구려사 연구에서 흥미있는 담론이긴 하네만, 고구려 사관들이 만조선 시기의 역사를 가져와서 끼워맞추기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귀하가 제시한 이념형이 먹히지 않겠나?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13:51 #

    답보상태라.., 참 정확한 표현이오이다. 음.., 고구려 사관들이 왜 위만조선 시기 역사를 가져와서 끼워맞추기를 하였는가? 그것은 후한서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지금의 국내성 남부 북한 자강도 강계 일대에 조선 유민들이 살고있었다는 것인데.
    고구려는 후한서에 의하면 건국 초기인 기원전 108년부터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와 바로 대립 구도로 들어가면서 현도군을 기원전 82년 내쫓는 역할을 하게된다. 고구려의 중심지가 졸본,집안 일대이고 집안이 강계와 가깝다는 면에서 조선 유민의 문화적 영향 혹은 정신,사상,세계관적 다양한 영향이 위만조선 초기부터 길림 일대 고구려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이고, 고구려는 위만조선의 왕호를 일부분 계승하고 위만조선의 역사도 고구려 초기 역사인 것처럼 꾸밈으로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세운게 아닌가 싶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13:52 #

    부여 시조 동명의 일을 마치 주몽의 일인것처럼 삽입햇듯 위만조선의 일도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삽입한 것이다. 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2 13:54 #

    그러나 왜 고구려가 왜 조선을 계승했다라고 당당히 말하지못했을까? 아마도 그건 고구려의 성격 자체가 '북부여 계승'을 표방하는지라 부여족 출신의 고구려 왕족 그리고 계루부계 고구려 왕족이 자신들의 정통성에 굉장히 민감했던 것 같다. 그들은 조선보다는 부여,계루부로서의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키는걸 중요시했던 것 같다.
  • 마에스트로 2012/05/03 10:07 #

    이 부분도 만조선의 중심지가 환인, 집안 등 대략 고구려의 초기 영역과 중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군. 문헌 쪽에서는 몰라도 고고학쪽에서는 평양 지역이 만조선의 중심지란 근거는 없으니까 그 지역으로 보는 것도 아주 근거는 없지 않을 듯하다. 문헌하고 고고학 자료가 다른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 만조선 중심지를 그렇게 설정하는 설도 보았으니 아직 답보 상태의 학설에서는 충분히 나올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도 비정될 가능성은 없겠나? 북한 지역의 발굴 성과들도 한번 보아야 하지 않겠나? 뭐 김일성 찬양 같은 것 따위는 무시하고 그 놈들 주장은 걸러서 본다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3 12:03 #

    흠. 그러게말일세. 그리고 다른 곳으로 비정될 가능성이라? 그래서 쭉 생각해보았다네.
    만약 환인,집안,집안의 남쪽 북한 자강도 강계 일대를 제외한 다른 곳이라면 일단 임둔 지역 진번 지역 낙랑 지역을 들 수 있네만 낙랑 지역에서 조선현은 이미 고고학으로 논파가 되었고 낙랑의 중심지 조선현을 제외하고는 딱히 중심지로 볼만한 데도 없고 북쪽으로 갈수록 인구가 점점 적어지고 한서지리지 낙랑군편을 봐도 조선현이 왕검성이 아니라면 딱히 다른 현들이 왕검성이라 할 정도로 현 이름에서 뭔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 그렇다면 임둔 진번인가? 진번은 황해도니까 애초에 제외되는거고 임둔은
    왕검성의 수도라 할 수가 없고 (바닷가에 접해있으므로) 그렇다면 낙랑군의 최북단이 청천강 경계선이니까 역시 청천강 이북에서 찾아야하는데.
    요동의 서안평과 접경한 지역인 평안북도 일대에 수도가 있다는건 말이 안되지. 압록강으로 쉽게
    한나라 수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요동의 서안평과 너무 가까울 뿐더러...,
    그렇다면 함경남도,함경북도인가? 이것도 창해군의 위치하고 겹쳐지므로 가능성이 없고.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환인,집안,집안 남쪽 자강도 강계인데.
    이 세 곳 모두 고구려 때 각각 졸본,국내성,동천왕의 평양성(왕험성)이니까 집안(국내성)과 자강도 강계(동천왕의 왕험성) 둘 중 하나겠군.
  • 제홍씨帝鴻氏 2012/05/03 12:03 #

    내 나중에 이에 대해서 더 자세한 글을 올려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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