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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이희진)가 스스로 책장사꾼이라 고백하다. by 제홍씨帝鴻氏

식민사학자들의 광개토왕비 악용과 그 추종자들


블레이드(이희진)가 스스로 책장사꾼이라 고백하다.













광개토태왕비에서만 고구려가 왜를 언급할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고구려가 왜를 언급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광개토태왕비에서만 고구려의 보기 5만이 왜를 쓸어버리고 임나를 정벌하여 왜군을 초전박살낸게
나오는데. 삼국사기나 다른 모든 기록들에는 이런 기록이 전혀 안나오니까 광개토태왕비는 뻥이라는 논리가 되나?
왜 자폭 논리를 스스로 대는지 모르겠네. .... ㅡㅡ.....;



                                                                        (고구려 장군)


일본 학자들이야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않는 이유는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임나가 본거지이고
열도의 왜는 임나의 멀티에 해당되니까 이렇게되면 한반도 문화의 너무나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게되는거라서 용기있게 말할 수도 없어서 그들로서는 임나일본부를
부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
물론 에가미 나미오 같은 기마민족설 학자는 용기있게 임나가 본거지라고 주장하지만말이다.
왜 에가미 나미오같은 사람의 예는 안들고 겁쟁이 일본학자들 얘기만 꺼낼까?

일본은 천황 고분도 함부로 파헤치지못하고 천황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 사이코 우익들이 아직도
있는 동네라는걸 잊어선 안된다.




                                                                          (임나의 장군)


또 블레이드는 일본서기에 고구려와 왜의 관계를 묘사한 기록이 적으며 .., 왜가 고구려의 경쟁자였다면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적고있다.
하지만 블레이드는 일본서기를 본 적이 없는 바보에 불과하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에 고구려 장수왕(광개토 혹은 장수왕)이 응신천황에게 편지를 보내자 편지가 무례하다하며
인덕이 고구려 사신에게 질책하고 분노하며 편지를 찢는 장면이 나온다. 고구려와 왜의 관계가 썩 좋지않고 매우 적대적인
관계라는걸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제위 28년 가을 9월 고구려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를 올렸다. 그 표에
"고구려왕이 일본국에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그때 태자가 그 읽고서 화를 내어 표의 무례함에 대해
고구려 사신을 질책하고 그 표문을 찢어버렸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분노한 인덕태자)


또 백제의 진사왕을 죽이고 반고구려 성향의 아신왕을 즉위시키는 것 역시 응신천황이 관여햇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다. 이 이상 일본서기가 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지만 광개토태왕비에서 나오는 고구려 vs 왜의 대립 상황과
매우 비슷하게 서술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392년 이해 백제의 진사왕이 서서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미,우전시대숙미,
석천숙미,목토숙미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미 등은 아화(아신)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야마토 기각숙미 장군)



"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같은 책에 나온 논리만 가지고 논쟁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라고 블레이드가 말했다.
그러면 자기는 책을 대충 썼다는 말을 스스로 하는 셈이다.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구만.

대중이 알아보기 쉽게 쓰려고 썼다고? 이덕일과 같은 책장사라는걸 스스로 토로하는구먼. ㅉㅉ...,











블레이드를 또 논파하다!






덧글

  • ... 2012/05/05 17:10 # 삭제 답글

    일본서기를 아주 그대로 믿어버리시는군요 쩝;;

    응신기는 일본열도가 아직 완전한 세력 규합도 못한 시기였는데, 백제 왕가 간섭을 한다는게 참;;
    일본서기는 적어도 케이타이 이후에 들어서야 그나마 신빙성이 있거늘..
    천황개념이 자리잡던 시기에 편찬되었던 일본서기를 사료비판도 없이 수용하시는 것을 보니 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

    제 눈에는 이번 글은 논파가 아니라 그냥 정신승리로 밖에 안보입니다.

    제홍씨님의 반박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제3자의 눈으로 봤을때 이건 블레이드님이나 제홍씨님의 그냥 의미없는 논쟁으로 밖에 안비춰지는군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7:11 #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면안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7:13 #

    오히려 백제와 야마토 왕가가 4~5세기 중엽까지 직접적인 문물교류관계는 아니었고 문물교류가 거의 없었고
    야마토는 임나(김해대성동고분)와 100% 의존 교류를 하였지만 백제와 서로 혈연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광개토태왕비가 서기 391년 왜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지배했다고 말하는 점. 서기 391년 일본의 오진(응신) 천황과 백제의 아신왕의 이름이 서로 유사한 점, 일본서기에서 아신왕의 즉위에 야마토가 관여했다는 점을 보면 말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7:14 #

    즉 백제의 왕가에 야마토 피가 섞인 아신 왕자가 있었고 아신 왕자가 백제의 내분을 틈타 진사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여기에는 야마토의 용병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야마토는 백제에 그 외 어떤 군사적인 행동을 할 정도로 백제에까지 강한 힘을 갖추진못했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 ... 2012/05/05 17:47 # 삭제 답글

    391년 기사는 너무나 해석이 다양합니다.
    게다가 일본서기는 앞서 말했지만, 사료의 신빙성이 6세기 즈음 들어서야 생기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생각하기는 좀 그렇다고요.
    그렇게 본다면 제홍씨님의 해석은 약간 무리하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왜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점.
    광개토대왕릉비대를 그렇게 해석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합니다.
    원래는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그것이 왜로 인해 전복된다면 왜 고구려는 백제만을 쳤을까에 대한 모순이 생깁니다.
    또한, 이런 모순을 감안하여 해석한다면 이것은 백제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그렇게 썼을것으로 예상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천관우 선생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문맥을 보고 새롭게 해석하셨지요.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온 고로, (왜와 연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신라가 고구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고, 그래서 고구려는 백제와 임나가라를 친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9:02 #

    사료의 신빙성은 광개토태왕비와 교차 검증을 했습니다. 일본서기의 391~392년 기사는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와 매우 유사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9:03 #

    또 391년 태왕비 기사가 해석이 너무 다양하다고 하시는데. 변조설은 근거없는걸로 이미 논파됐구요. 기사의 주어를 고구려로 하자는건 망상이고. 고구려의 과장이라고 보는 학설은 단순 상상이니까 이 역시 근거가 없구요. 비문의 해독 자체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서 백제 가라 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게 정답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9:05 #

    일본서기 사료의 신빙성은 391~392년 기사와 광개토태왕비와 교차검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4세기 말의 당시에도 신빙성이 충분히 있구요.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근초고왕의 마한 남정이 일본서기에만 나오는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본서기에 신빙성이 6세기 즈음에서야 생긴다고 주장한다는건 이해할 수가 없군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9:05 #

    글고 천관우의 해석은 비문에 없는 글자를 끼워넣는 망상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19:09 #

    그래서 전 고고학연구나 여러 논증을 들어 이렇게 결론을 내려봅니다.
    태왕비에서 백제가 신묘년에 왜가 격파당해 신민이 되었다는건 야마토 계열의 백제 왕자가 진사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 것으로, 가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건 서기 4세기 전반 임나의 수장이 야마토 수장이 사용하는 파형동기,통형동기를 다량으로
    부장하고있다는 점으로 야마토 임나의 두 수장층이 매우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맺었고 야마토는 임나의 멀티라는 점 등 에서 비슷한 양상을 확인 가능하고 당시 임나가 가라를 지배한 점에서 광개토는 임나,야마토를 동일한 왜倭로 파악하고 가라는 식민지배당하는 상황으로 이해. 왜가 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건 야마토가 임나 수장을 매개로 해서 신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해서 서기 400년에 신라의 수도를 임나,야마토인들이 포위해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 2012/05/05 22:38 # 삭제 답글

    분명히 391년의 해석은 제홍씨님의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긴 합니다만, 제가 지적한 모순에 대한 대답이 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네요. 왜 광개토대왕은 백제만 공격하고 신라를 살려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입니다. 똑같이 왜에 위협을 받았다면 (혹은 신민으로 삼겨졌다면) 둘다 광개토대왕은 신라고 공격하여야 되지 않을까요?

    파형동기나 통형동기가 다량으로 보이는 것도 그냥 교류의 흔적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나,
    제홍씨님의 해석을 보고 새로운 해석이라 놀라긴 했습니다.

    야마토와 임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그 당시 야마토 힘에 대해서 엄청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4~5세기 일본열도는 기비 지방만 보더라도 여러 개의 고대한 고분이 발견됩니다. 이런 것들은 대왕에 필적할만한 지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소리인데 자기네들 힘도 규합하지 못했는데 과연 신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을까요..?

    제 눈에는 일개 도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꼭 고려말이나 조선조에 왜구가 설쳐서 국가가 혼란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파형동기는 교류과정에서 그냥 흘러들어온 것으로 해석한다면 임나=왜라고 파악하기는 힘들듯 합니다.

    진사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 왕이 야마토 계열이라는 것도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근초고왕의 마한 남정이야 말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이 되지않는 큰 문제지요.
    그렇기 때문에 마한 정복을 자꾸만 늦춰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신빙성도 6세기 대로 내려가는 것이지요.

    뭐, 저는 귀를 항상 열어놓고 있는지라 제홍씨님의 해석도 상당히 흥미롭긴 합니다만.. 그래도 의문점은 제기하고 갑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41 #

    광개토태왕이 신라를 공격하지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라는 피해자고 백제는 피해자라기보다는 백제 내부 정권 다툼으로 백제 야마토 혼혈 혈통 계열 정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백제는 쳐야죠. 그 이유 말더라도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원수이기때문에 쳐야되구요.
    신라는 원래 광개토 이전부터 고구려와 외교 선을 닿고있었습니다. 근초고왕 말기에는 백제에 외교적문제로 깝칠 정도로 점점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더니만 근구수왕 시절에는 전진에 단독으로 사신을 보내는 일까지 하게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42 #

    당연히 백제로서 고구려를 대적하기위해선 신라를 임나,야마토와 함께 포위해서 공격해야합니다. 그래서 신라를 임나,야마토가 공격하니까 신라가 도움을 청한거죠.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43 #

    감사합니다. 새로운 해석이긴하죠. 종래 자꾸 교류의 흔적으로만 보려는 인식들이 너무 많은데. 야마토의 수장이 쓰는게 다량으로 출토되고 중국계나 북방계 문물은 그에 반해 적다는거는 주목해야할 현상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46 #

    3~4세기 당시 야마토가 지방세력들이 난립하지만 중심 세력은 규슈하고 야마토입니다. 그리고 이미 3~4세기에 야마토,규슈는
    서로 완전 따로따로 노는게아닙니다. 야마토 문화 자체의 성립 자체가 규슈,이즈모 등의 여러 지방 문화들의 요소들이 야마토로 한데 모여져서 형성되어 전방후원분이라는 묘제를 창출하게 된거구요. 야마토는 중심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슈는 야마토를 대신하여 외국과 무역을 하고 문물을 수입하여 야마토로 들여오는 역할을 하며 야마토의 지방 호족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완전 남남이 아니라는거죠.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50 #

    그리고 야마토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가 어떻게 성립될수있는거냐? 간단합니다.
    태왕비는 가라가 왜에게 식민지배당했고 그 왜의 한반도 본거지가 '임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임나란 정치체에 대한 서술은 나라이름 딱 한번 언급하는걸로 끝나고 임나,가라를 지배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왜라는걸 강조합니다.(임나,가라는 별개의 세력임)
    임나의 수도 염성을 함락시키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라고 하고 가라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고하고 가라인의 10분의 9는 왜를 반대했다고합니다.
    즉 태왕비는 임나 수장 세력과 야마토를 똑같은 왜倭로 본 것이고 고고학적인 출토 결과도 그런것에 가깝습니다. 또 이 왜가 신라를 단독으로 공격하였다는 태왕비의 기사로 보더라도(백제,가라는 참전하지않음. 임나=왜가 참전함. 가라는 지배당하는 입장임.)
    신라에 대해 군사적 우위가 있었다는건 사실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51 #

    만약 야마토가 일개 도적이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신라 수도가 왜에게 포위당하고 신라는 그깟 왜 하나 막지못해서 고구려에게 지원 요청을 할까요?
    글고 야마토는 임나에서 철정을 수입해서 갑옷을 제작하고있고 토용 출토로 보아도 이미 무사 집단의 존재가 확인되고있습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52 #

    파형동기,통형동기가 그냥 교류과정에서 흘러들어온거라면 수장의 무덤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현상은 이해하기힘들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거구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2:55 #

    아신왕이 야마토 계열이라는건 일본서기의 오구나타케루에 대한 기록이 근초고왕으로 해석된다는겁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마한 남정은 금강 일대에까지 근초고왕 시기 백제계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전라도에까지 영토가 미쳤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서도 침미다례를 왜국이 정벌했다하지.
    백제가 정벌했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가야계 고분이 출토되는 것도 요런 정황과 연결될 소지가 있다고 보입니다.
  • ... 2012/05/05 23:19 # 삭제 답글

    음..

    일본서기에서 왜국이 침미다례를 정벌했다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금강 유역일대에 근초고왕 시기 전후로 백제 중앙 양식의 토기나 여러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남정이 전라도 일대까지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문입니다. 이것은 저도 제홍씨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 기록대로 왜가 탁순국에 모여 가라 7국을 정벌한 후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침미다례를 쳤다는 것은 상당히 의문입니다. 분명히 일본서기 기록에는 '남만' 침미다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국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북만이나 북서만 혹은 임나를 제홍씨님 말대로 야마토 세력으로 본다고 치더라도 서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료에서는 남만이라고 되어있지요? 이것은 단적으로 백제기나 백제본기 등과 같은 백제류 사서에서 뽑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침미다례 정벌은 분명히 허구이거나, 주체는 백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향의 모순은 일본서기 내에서도 몇몇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임나를 운영한 주체는 백제이거나 아니면 가야의 독자적인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신라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적이 자꾸 치고 빠지면서 괴롭히는데 그 근거지를 임나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나는 왜의 도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대신 대중 교역권을 신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라고도 해석이 됩니다. 당시 임나의 세력은 신라와 대등했기 때문에 서로 맞서다간 힘만 뺄 뿐이었겠지요. 그래서 임나는 자기는 회피하면서 왜적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적을 소탕하려면 임나를 쳐야되는데 그곳을 쳤다가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신라는 할 수 없이 광개토대왕에게 요청한 것이 아닐까요?

    계속해서 의문점만 생기는군요.

    다른 분에게도 제홍씨님의 해석을 들려주고 싶군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26 #

    일본서기의 왜倭를 임나의 멀티인 야마토가 아니라 '임나'로 봐야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27 #

    그리고 일본서기의 가라7국 정벌 연대 자체가 원래는 서기 3세기 중반경인데. 이주갑상승시켜 369년으로 처리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연대가 다 맞는 연대입니다. 서기 3세기 중반~서기 369년 사이에 임나라는 강력한 정치체의 등장과 김해대성동고분군성립,가라가 임나의 영향 아래 복속됨.전라도까지 임나 고분이 진출. 이런 것들이 말이죠.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28 #

    일본서기 자체를 무조건 백제류 사서로만 봐선안됩니다. 야마토,임나,백제의 모든 일들이 다 혼재되어있다고 보는게 옳겠습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29 #

    임나는 백제가 아닙니다. 왜냐면 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 백제유물이 안나오기때문이죠. 나온다해도 매우 극소수입니다. 가야의 독자적 세력도 아닙니다. 문헌에서 임나,가라는 따로 구별되서 나오니까요.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30 #

    신라가 고구려에 요청한건 "수도를 왜가 포위하고 곤경에 처했다."는 겁니다. 자력으로 물리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럿다는거죠.
    태왕비는 어디까지나 주체를 임나가 아닌 '왜倭'로 적고있습니다.
    만약 님의 해석대로 한다면 태왕비를 부정해야합니다. 당대 사료를 부정한다는거죠.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31 #

    임나를 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상당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신라는 임나와 대립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합니까? 백제가 함께 칠까봐서요? 백제는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서 함부로 군사 이동이 어려운 입장이니까 그것도 말이 안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5 23:36 #

    중요한 요점은.

    1. 태왕비는 임나를 지배하는 주체를 왜倭라 본다.

    2. 태왕비는 임나와 야마토를 동시에 왜倭라 부르고 있다.

    3. 태왕비는 가라가 왜에게 정복,지배당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4. 신라는 왜를 감당할 국력이 없고 수도까지 포위당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

    5. 백제는 신라를 치는데 가담 자체를 안함. 고구려에 복속당한 상태라서.

    6. 태왕비 기사를 '과장'이라고 부정한다면 당대 사료를 부정한다는 것임.

    7. 임나의 중심지 김해대성동고분의 수장급 무덤에서 야마토의 수장이 사용하는 파형동기,톻형동기가 다량으로 부장됨. 이는 야마토와 혈연 등 매우 밀접하고 아주 밀접한 교류를 하였음을 의미. 임나는 야마토에 철정을 제공하여 야마토는 그걸로 갑옷 만들고 군사들도 양성. 태왕비에서도 확인되듯 임나,야마토는 같이 군사 활동을 공동으로 진행하였음. 야마토는 백제와의 문물 교류가 99.9% 없었고 임나에 문물 교류를 100% 의존하는 상태였음. 야마토는 임나의 멀티였음. 임나가 본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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