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의 중심지 무덤은 무기단 적석묘였다!!!!! by 제홍씨帝鴻氏

위만조선의 중심지 무덤은 무기단 적석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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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파악할 사항은 위만조선의 무덤,토기,중심지에 대한 논증이다.
답보 상태에 빠진 위만조선사 연구의 획기적인 돌파점이 되리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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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일 1시간 만에 저술.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확인해야 위만조선의 무덤,토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종래 필자는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집안 일대(고구려 국내성)라고 보았다.

하지만 집안 일대만 보아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집안 일대에서는 아직 위만조선 시기에 사용된 중심지 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고
집안에 설치된 현도군의 고구려현이나 졸본 서북에 설치된 상은태현(통화의 적백송고성).
북한의 개마고원의 서개마현. 제1현도군인 옥저성(함경남도 함흥)에 대한 한서지리지 현도군편의 기술 어디에도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낙랑군에 관한 한서지리지 낙랑군편의 기술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낙랑군편 어디에도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낙랑군 어디에 있다는지 기술이 전혀 없을 뿐더러
낙랑군의 중심지 조선현이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라는 고고학적 증거가 전혀 없을 뿐더러 왕검성도 전혀 출토된 적이 없고
오히려 낙랑군 중심지 조선현은 청동기 세형동검 중심 문화로 위만조선의 철기 정복 국가의
사료적 정황과는 전혀 반대되고 있다. 게다가 위만조선은 사료로 보면 철기 무력에 바탕한 연나라계의 유민 집단과
그들의 수장인 위만이 고조선을 복속시키고 고조선 준왕을 쫓아낸 후 그들이 위만조선을 세워 위만조선의 최상위 정치부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 때 연나라계 유민의 수많은 유입이 이루어져 고조선의 종족의 양상이 크게 변동되었다.
그런데 낙랑군 일대의 고고학적 정황 즉 청천강 이남에서 대동강 이북까지의 고고학적 정황은 전혀 딴판이다.
청동기 세형동검이 여전히 주류이고 철기는 극소수인 것으로 보아 토착민이 대부분이고 외부인의 유입은 크게 보이지않는다.
그 집단 안에서의 세력 변동이 컸다고 볼 수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낙랑군의 다른 현들 중에 왕검성이 있을까?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는건 위의 고고학적 정황으로 다 논파된다.
또 낙랑군의 중심지 조선현 자체가 이미 왕검성이 아닌데. 그 외에 부속된 다른 부속품(부속현)들이 무엇에 가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졸본,집안,낙랑군도 아니라면 진번,임둔군에 왕검성이 있을까?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진번군은 황해도로 탈락. 임둔군은 함경도라서 교통 요충지도 아니고 한 나라의 중심지로 볼 수 없음.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왜 한나라는 자신들이 적은 한서지리지 현도군편,사기 조선열전,한서 조선열전 어디에도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다시 한번 사료를 검토해보자.




한서 지리지에서 응소의 주석은 왕검성은 '왕험성'이라 불렸고 또 '험독'이라 불렸다고 말한다.
신찬 역시 왕검성을 '험독'이라 부르는데 동의한다. (험독,현도는 발음이 비슷하여 같다고 볼 수 있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응소가 말하길:「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의 험란함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험독이라 하였다.」

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이 말하길:「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이 험독이 맞는 것이다
.」-한서지리지 요동군편 주석










그런데 응소와 신찬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응소는 조선왕의 수도 험독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고 한 반면
신찬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는 고고학적 정황으로도 비슷하게 맞아들어간다.
기원전 7~6세기에 형성된 요동의 비파형동검 정가와자 유형 문화(조선 국호를 공식으로 제정한 초기 고조선)의 분포 범위는
요동 일대니까 응소의 주석은 초기 고조선 수도가 요동이었다는 고고학적 정황과 일치한다.

정가와자 문화가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세형동검 문화를
이루어 다시 조선을 형성하니까 신찬의 주석은 이 당시 혹은 그 이후와 연관있는 것으로 봐야한다.








자, 이제 다시 중요점을 말하면 이 둘이 고조선의 수도가 험독이라고 불리는데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신찬이 말한 후기 고조선의 수도 '험독' 혹은 '왕험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신찬이 말한 이 성이 아마 위만조선 멸망 당시의
왕험성으로 보이는데.
신찬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패수는 낙랑군의 패수현으로 이 패수는 청천강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찬이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말한건 청천강의 동쪽이나 동북쪽을 이르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북한 자강도나 함경도가 해당되는데. 함경도는 임둔군,창해군의 영역이니 제외시킨다면 자강도가 여기서
유력하게 된다.







삼국지,후한서의 고구려전은 신기하게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고구려의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있다." -삼국지,후한서 고구려전


너무나도 쉽게 딱딱 답이 나온다.
고구려의 중심지 집안(국내성)의 남쪽으로 조선이 있다는 것이다.
집안의 남쪽은 바로 자강도다. 남쪽의 예맥은 개마고원. 동쪽의 옥저는 함경남도,함경북도
북쪽은 길림 송화강 유역의 부여.....,


그렇다면 이 기록은 집안의 남쪽에 서기 3세기까지 조선 유민 집단이 부족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런 충격적인 기록을 왜 학계가 지나친 것일까? 그건 종래 학계가 이 '조선'을 낙랑군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거는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같은 삼국지,후한서의 고구려전은 물론 여타 동예전,동옥저전
,한韓전,부여전 등에서는 낙랑으로 표기하면 낙랑이지. 조선으로 표기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 당시에도 여전히 존재하던 조선 부족 국가가 등장할까?


고구려 태조왕이 살수(청천강)까지 남쪽 영토를 넓힐 때 조나국,주나국을 정벌하는데.
학계는 조나국과 주나국의 이웃 국가인 주나국을 모두 자강도 일대에 비정한다.


"서기 20년 봄 2월에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어 조나를 쳐서 그 왕을 사로잡았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어 주나를 쳐서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본기









고구려는 태조왕 당시 비류나부,환나부,관나부,연나부,계루부의 부部 편성이 이루어진다.

‘나부那部’란 태조왕으로 대표되는 계루부의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는 나라는 의미이다.

반면 이 자강도 일대의 조나와 주나는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기 이전의 독립적인 단위정치체라는 의미에서
부를 관칭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나와 조나는 정복되기 이전에는 왕과 왕자로 상징되는 독자적 운동력을 가졌고
상당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지역정치집단을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나국那國’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근데 이것을 후한서,삼국지는 '조선'이라 부른다는 점이고 '조나' 역시 '조'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는게 너무나 신기한
점이다. 비록 조선의 조朝와는 다른 조(藻)이지만 후한서,삼국지에서 이들을 조선이라 부를 때를 볼 때 발음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볼 수는 없겠다. 그러면 주나는 무엇일까? 아마 조나와 비슷한 발음으로 조나에서 독립되어 나온
별개의 부족 국가였을까...라고 가정해 볼 순 있겠다.

주나국의 왕자 을음乙音은 2세기 고국천왕의 개혁정책을 지휘하게되는 재상 을파소의 조상이다. 을파소는 단군 관련
민간 야사에서 단군 시대의 경전 참전계경을 전승했다는 인물로 나올 정도로 고조선과 연관을 맺고 있다.




서기 247년 고구려의 동천왕은 수도 집안(환도,국내)이 관구검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지자
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평양'으로 천도한다.













그런데 동천왕이 천도한 이 평양은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있다.


"21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거쳐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신인(神人)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이르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그러므로 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알아낸다면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도 자연스레
알아낼 수 있다.


'동천東川' 혹은 '동양東壤'이라 표기되는 그의 시호로도 알 수 있듯 그는 동쪽으로 천도한 왕이었다.

그런데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현 북한의 평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 당시 북한의 평양은
여전히 낙랑군의 중심지 조선현이 있었고 청천강까지는 낙랑군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일까? 집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다면 고구려의 중심지를 위나라의 침입으로부터
과연 보호가 가능할지 의문이고 중심지와 그리 멀리 떨어지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옥저 지역인 함경남도로 천도하자면 낙랑군의 침입에 쉽게 당할 우려가 있다.
이미 낙랑군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전쟁할 당시 함경남도로 쳐들어와서 함경남도 부락들이 약탈당하고
이 곳 지배자인 '불이예왕'은 서기 247년 위나라에 조공을 가 책봉도 받았기 때문이다.
또 함경북도로 볼 수도 없다. 북옥저(함경북도) 역시 위나라 관구검의 추격군에 약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후보지는 자강도 밖에 없다. 자강도는 집안과도 가깝고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져있어
천혜의 요새다. 관구검이 이 지역으로 침공하였다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vs위나라 전쟁에서
안전했던 것 같고 더러 6.25 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은 중요한 전략 거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천왕이 죽자 이어 즉위한 동천왕의 아들 중천왕은 바로 동천왕이 천도했다는 그 왕검성에 살게된 왕인데.
중천왕 당시 연나부와 관나부와 서로 권력을 다투었는데.
연나부는 고구려 신성 지역의 호족이고 왕비 부족이었다. 관나부는 국내성 남쪽이고
북한의 자강도에 살던 부족이다.
중천왕은 관나부 출신 부인을 대단히 총애하였다고한다.
연나부는 위나라의 침입으로 터전을 잃어버리고 자강도에 내려와서 토착족인 관나부와
결투하였고 중천왕은 최대한 관나부의 편의를 봐주려하였으나 왕비 부족인 연나부의
등쌀에 못이겨 결국 관나부 부인을 바닷가에 던져버린다.

바다에 던졌다는걸로 보아 이 때 수도의 위치가 바다와 인접하였다고 추정된다.

또 왕이 두눌원으로 사냥나갔다고 적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에 동천왕이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지켜준 이들에게
압록원,두눌하원을 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압록원은 압록강의 상류. 두눌하원은 자강도 독로강 유역으로 비정한다.



놀랍게도 이병도는 동천왕이 천도한 왕검성(평양)을 자강도 강계 지방으로 비정했다.


이형구 교수는 위만조선의 무역 형태에 대해서 한반도 북쪽에 지리적인 요충지에 자리잡아 그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중심지 무역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흑자를 보았다고 보며 당시의 무역로는 명도전의 출토지로 보아
난평-요양-무순-위원, 강계-평양이 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산둥 반도를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자강도 강계가 명도전의 교역 통로 중간에 해당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자강도에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이 바로 '험독'으로 불렸고
한무제 당시 한나라는 이곳을 '현도'라고 불렀다. 험독,현도는 발음이 비슷하여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는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이간계까지 동원하여 겨우 왕검성을 함락시킨다. 자력이 아닌, 내부의 분열 덕분에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왕검성에 군현을 설치하여 그 곳을 어떻게 하였다느니 뭐니하는 기록은 중국 기록들에서 자취를 감추게된다.
그리고 한무제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섰던 장군들을 참수하거나 직위 해제시킨다.


"좌장군을 불러들여 그가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조리돌렸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벌금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사기 조선열전






사마천은 한나라와 위만조선 양군이 피해만 당하고 투항한 위만조선 귀족이나 위만조선 침공한 한나라 장군들이나 모두
제후로 된 사람도 없다고하여 한무제의 전쟁을 평가 절하하고있을 정도였다.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
-사기 조선열전








이런 기록들이 남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후한서 고구려전에 적혀있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


"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후한서 고구려전






자강도의 왕검성이 함락되자 한무제는 바로 고구려족과 마주치게된다.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족!
하지만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족의 계루부,연나부,비류부,관나부,환나부는
압록강 중류 자강도를 중심으로 사방에 퍼져있는 위만조선의 여러 부들이었다.


이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파헤칠려면 기원전 4~3세기로 돌아가야한다.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조선과 진번은 후퇴하게된다. 조선은 청천강 이남으로,
진번은 압록강 중하류 일대로 후퇴한다.

진번은 요동반도에서 적석묘를 주 묘제로 하는 집단이었다.(누상,강상무덤)

이들이 압록강 중하류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집안 오도령구문 적석묘는 당시 압록강 중류유역을 대표하는 적석묘 유적이다.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단계에 해당하는 이러한 유적들은 곧바로 연나라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위만조선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이룩하게 된다.



압록강 중류로 대피한 진번의 적석묘 집단은 압록강 중류유역에 넓게 자리하면서 많은 집단으로 나뉘게 되고,
이러한 집단들은 그 세력의 강함과 약함에 따라 점점 더 큰 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 건국을 구성한 5부족을
“∼나(那)”라 칭하는데 이 “나집단”은 소집단이 뭉쳐서 이루어진 대집단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기원전 3∼2세기 경 압록강 중류유역은 이러한 집단들이 쟁투를 위하여 힘을 축적하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것은 고고학적인 현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집단의 고고학적 양상을 보면 고고학적으로 '무기단적석묘' 단계로 확인되며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이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 , 상류와 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있다,



                                                          (무기단 적석묘)


일반적으로 적석묘에서는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철제 농기구 , 무기 ,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고,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에서는 전국 , 진 , 한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다.

즉 이들은 이미 철기 사회로 진입하였고 전국시대,진,한을 거쳐 중국과 교류를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고
이들 문화의 시기는 위만조선 시기와 겹쳐지고 있다.


이 적석묘 집단들은 기원전 3세기 이래로 단계적으로 무덤의 형식을 변화시켜
가면서 발전해가고 있었다. 또한 여러 개의 “나집단”들이 쟁투하면서 군사적 역량이 매우 높아져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왕을 칭할 정도로까지 발전한다.

여기서 '기원전 2세기 초'라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바로 이 때는 기원전 195년 위만조선 성립 시기가 아니던가.....!

학계는 이들 집단이 기원전 2세기 중엽경에 '구려'라는 연맹체를 이루었다고 파악하고 이들은 '원고구려사회'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구려이니 졸본부여이니 원고구려이니하는 연맹체는 중국 사서 어디에서도 등장하지않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고구려 신화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이름일 뿐이다.

이것은 위만조선 연맹체라고 보아야 맞다.





이 압록강 중류의 무기단적석묘 문화 단계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자강도 노남리에서 형성된 노남리형 토기로
학계는 이것을 원고구려사회의 최초 토기라고 보지만 이것은 위만조선의 토기라고 불려야 맞다.


노남리 토기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 철기문화와 회도의 영향 + 고조선의 미송리토기 문화가 합쳐져
형성된 토기다. 외래적인 요소와 고유의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남리 토기의 형성 시점은 기원전 200년경으로 위만조선의 형성 시기와 일치한다.

노남리 유적에선 집자리와 야철지가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철촉,철부, 띠고리, 송곳, 낚시바늘 등
한나라 시대 이래의 단조철기들 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기 문화를 벗어나 철기 사회로 진입하였음을 말해준다.

노남리형토기의 분포지역은 환인,집안 지역,압록강 중류,한반도 북부,태자하 상류 지역에 걸쳐있어
위만조선의 광범위한 영토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적석총의 등장 시점은 역시 노 남리형토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노남리토기는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유적의 윗층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표식으로 한다.
노남리토기의 특 징을 우선 제작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이전의 청동기시대이래의 토기들의 모래 섞인
태토와 달리 고운 점토로만 구성된 泥質이라 는 점과 아울러 표면을 磨硏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작기술상의 특징은 전술한 것처럼 초기철기문화와 함께 들어 온 중국의 전국말-한대의
灰陶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음, 형태상의 특징은 종방향 또는 횡방향으로 붙은 橋狀把手이다. 이러한 형태의 손잡이는 거슬러 올라 가면
청동기시대의 공 귀리유형 및 미송리형토기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남리형토기의 특징은 외래적이기 보다는 고유의 지역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지역 전통과 관련하여 磨硏 技法과 같은 제작기술도
이미 미송리형토기에 그것이 보이고 있어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송리형토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니질의 태토는 분명히 전국말-한대의 회도와
관 련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이면에는 초기철기와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제작기술과
재래의 형태적인 요소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그렇다면 이러한 노남리형토기의 형성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로 비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보는 것(정찬영1973 : 40-41)과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것(리창언1991)로
나뉘어 진다.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견해의 근거는 노남리형토기가 明刀錢과 공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철기의 내용으로 보는 한 이러한 연대관은 너무 올려 보는 것으로 판단된다.
노남리유적은 청동기문화층인 아래층과 노남리형토기가 나오는 윗층으로 구분되는데 윗층문화에 속 하는
유구는
집자리와 야철지가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철촉,철부, 띠고리, 송곳, 낚시바늘 등
漢代 이래의 단조철기들 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다수의 유적에서는 명도전은 흔히 半兩錢,
五銖錢 등과도
공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명도 전만을 근거로 연대를 올리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최근 淸原縣 南口前 大南溝 石棺墓( 達 張正岩1989 : 144-145)등에서 출토된 토기가 주목된다.
여기의 토기는 노남 리형토기의 특징들인 니질태토, 마연 등의 기술적인 요소와 더불어 縱耳의 교상파수가 달린
有頸壺 등 형태적인 요소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어 분명한 고구려토기들이다.
이 석관묘의 연대에 대해서 보고자들은 戰國末-漢初로 비정하고 있어 대략 기원전 200 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연대관 역시 분명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 보는 한 노남리형토기의
정확한 성립시점을 特定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이러한 검토내용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으로 기원전 200년경을 노남리형토기의 등장 始點 으로 보고자 한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한편 노남리형토기의 분포지역을 보면 지금의 桓仁, 集安지역을 중심으로 압록강 건너
한반도의 북부 및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앞서 살펴본 묘후산유형 및 공귀리유형 등의 청동기시대의 유적 분포권과도 대략 일치하고 있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이는 또한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積石塚의 등장 시점 역시 노 남리형토기와 비슷한 시기인 전국말-한초
무렵까지 소급되고 있는 최근의 조사결과(張雪岩1981)와 결부해 보면 더욱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

-高句麗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http://mahan.wonkwang.ac.kr/source/k16.htm





종래 평양 일대 낙랑 토기를 위만조선의 토기로 인식하였지만 그것은 준왕의 고조선이 위만에게 멸망한 후
전국계 연나라 문화의 일부가 평양에 들어와서 새롭게 형성된 낙랑 토기라 봐야하며 준왕의 고조선이 망하자
평양 일대에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이 생겨 위만의 직접적인 지배를 거부했고 위만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이들의 귀족들이 위만조선 사회 내에 들어와서 지도부에 들어올 수 있게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증거는 후한서에 있다.

후한서를 보면 기원전 177년 당시 낙랑에 대해 나오지만 조선이라는 구체적
중심지가 있었다는 언급은 없고 단지 산동의 왕씨 가문이 낙랑의 산골로 도피해서 그 곳에서 여차저차
성장했다. 라고 나올 뿐이다. '조선으로 망명했다.'라는 말이 없는 걸로 봐서 당시 낙랑은 조선의
중심지는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오히려 평양 지역에는 '조선'이란 중심지 나라가 아닌 조선에 속한 낙랑이란 나라 혹은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종래의 국사학계의 위만조선사 연구는 근본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글의 끝을 내리자면 위만조선의 형성은 압록강 하류,중류,상류,환인,집안에 분포한 고구려 5부족과  
자강도 강계의 위만 집단이(후일 조나국이 됨.) 함께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고 이들의 무덤은 무기단적석묘이며
토기는 노남리형 토기를 썼다.
자강도 강계의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내분으로 인해 한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이 지역에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지
못하고 집안에 제2현도군(고구려현), 함흥에 제1현도군. 환인(졸본)의 서북에 상은태현. 이것만 설치된 이유는
자강도 강계에 조선 부흥 세력들과 고구려족이 연합하여 한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족들이 곳곳에서 한나라를
공격하매 함흥에 설치된 제1현도군이 파괴되고 한나라는 후퇴하여 집안에 고구려현 토성을 세워 제2현도군으로 삼고
고구려족들을 방어하는 군사 기지로 삼지만 이것도 기원전 82년에 고구려족들에 의해 파괴되어 환인 동북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다.
결국 고구려족들에게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뺏기는 수모를 당한 한나라. 그런 한무제의 분노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간
장군들을 숙청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무제의 열폭의 이유였던 것이다.





요약:


1. 집안,환인은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2. 낙랑군도,진번군도,임둔군도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3. 함흥도,함경남도도,함경북도도,황해도도 위만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이 아니다.

4.  한나라는 자신들이 적은 한서지리지 현도군편,
사기 조선열전,한서 조선열전 어디에도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다.
위,진 남북조시대 이전에는 낙랑군이 왕검성이란 인식 자체도 없었고
왕검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응소만이 왕검성이 요동군 험독이라고 착각했다.


5. 응소의 왕검성=요동군 험독 주석은 기원전 7~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초기 수도 혹은 중심지를
의미하는 걸로 봐야 한다.

신찬의 왕검성=낙랑군 패수의 동쪽 설은 낙랑군=왕검성 설이라기보다는
낙랑군의 패수현의 패수(청천강)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는 것으로
청천강의 동북쪽 자강도 유역이 유일한 위만조선 중심지 후보지다.


6. 후한서,삼국지 고구려전은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에 고구려(집안 국내성)의 남쪽(자강도)에
조선이 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자강도의 조선을 '조나국'이라 기록한다.
자강도의 중심지 강계는 일찍이 이병도가 말하길 서기 247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나라를 피해 천도한
평양성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중천왕본기를 분석해보면 중천왕 당시에 중천왕은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에 살고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당시 평양성은 이병도 말대로 자강도 강계가 유력하다. 북한의 현 평양은 그 당시에
여전히 낙랑군의 중심지라서 천도 대상지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는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신인神人 왕검의 터.
혹은 왕험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강도 강계에 왕검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7.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 왕험성(왕검성)이고 이곳이 '험독'이라고 했다.
'험독'은 현도와 발음이 유사하다.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 즉 집안,자강도가 있는
그 일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위만조선의 중심지임을 넉넉히 알 수 있다.


8. 위만조선의 고고학적 양상을 환인,집안,자강도 일대에서 확인해보면 이 일대에
기원전 4세기 적석묘 집단이 형성되고  기원전 3~2세기 연나라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진,한漢의 철기 문화도 들어오면서 철기 시대로 진입한다. 이들의 힘이 축적되게 되고
이들은 5부족으로 형성된다.   이 시기의 묘제는 무기단적석묘였다.
이들 집단은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왕을 칭할 정도로까지 발전했고 군사적 역량이 매우 높아졌다.

기원전 2세기 초(기원전 200년경) 자강도 노남리에서 노남리형 토기가 형성되어
환인,집안,압록강 중류,한반도 북부,태자하 상류로 확산된다.
노남리 토기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 철기문화와 회도의 영향 + 고조선의 미송리토기
문화가 합쳐져 형성된 토기다.
외래적인 요소와 고유의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대가 바로 위만조선의 중심지였으며, 노남리 토기,무기단적석묘는 위만조선의 중심지 문화였다.



9. 위만조선의 형성은 압록강 하류,중류,상류,환인,집안에 분포한 고구려 5부족과
자강도 강계의 위만 집단이(후일 조나국이 됨.) 함께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고 이들의 무덤은 무기단적석묘이며
토기는 노남리형 토기를 썼다.
자강도 강계의 위만조선 중심지 '왕검성'이 내분으로 인해 한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이 지역에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지
못하고 집안에 제2현도군(고구려현), 함흥에 제1현도군. 환인(졸본)의 서북에 상은태현. 이것만 설치된 이유는
자강도 강계에 조선 부흥 세력들과 고구려족이 연합하여 한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족들이 곳곳에서 한나라를
공격하매 함흥에 설치된 제1현도군이 파괴되고 한나라는 후퇴하여 집안에 고구려현 토성을 세워 제2현도군으로 삼고
고구려족들을 방어하는 군사 기지로 삼지만 이것도 기원전 82년에 고구려족들에 의해 파괴되어 환인 동북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다.
결국 고구려족들에게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뺏기는 수모를 당한 한나라. 그런 한무제의 분노는 위만조선 정벌에 나간
장군들을 숙청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무제의 열폭의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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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제홍님!! 2012/05/06 16:09 # 삭제 답글

    지금 매식자카페가 스믈스믈 번식하고있습니다.
    http://cafe.naver.com/lovehistorypeople/4700
    제발 여기서 한수 가르침을 전수주고 오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제홍씨님만이 네이버를 평정할수있습니다.
    으으
  • 제홍씨帝鴻氏 2012/05/06 18:43 #

    그런 곳은 가봤자 바로 강퇴할 것 같군요. 왠지 악질들만 모인 곳인듯.
  • 제홍님!! 2012/05/06 16:10 # 삭제 답글

    아참 제홍님 다문화주의 옹호하십니까?
  • 제홍씨帝鴻氏 2012/05/06 18:43 #

    다문화주의라..? 어느면에서는 옹호. 어느면에서는 부정적. 반반입니다.
  • 황룡 2012/05/06 17:17 # 답글

    ㅋㅋㅋㅋ 화성인에 나오면 역사얘기를 많이 해주시구랴
  • 제홍씨帝鴻氏 2012/05/06 18:43 #

    ㅋㅋㅋㅋㅋㅋㅋ 알겠네.
  • 냠냠이 2012/05/06 18:34 # 삭제 답글

    와 재미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6 18:43 #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 재밌다 2012/05/07 10:56 # 삭제 답글

    헛소리 빼면 큰 틀의 학계의 논의랑 접근해 가고 있다는 걸 자기는 알라나...스스로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고 있어...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1:00 #

    현재 사학계는 낙랑설만 고수하지. 현도설은 신경안쓰는 중. 요하문명도 신경안쓰는중. 낙랑군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갓는지에 대해서도 고고학적 자료만 검토하지. 왕씨 낙랑이란 구체적인 설명이나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는건 안하는중(낙랑군이 식민지나 다름없기 때문에)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 유적이라 착각하는중, 김해대성동고분군이 가라의 유적이라 착각하는중. (왜랑 밀접한 교류를 한 .., 가라와는 이질적인 북방+왜계 세력인 임나의 유적인데말임.)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1:01 #

    큰 틀의 학계 논의는 무슨 개뿔. 스스로의 입지가 어딨어. 그냥 난 역사학도인데. ^^
  • 알콩달콩 2012/05/07 13:27 # 답글

    사학계를 비판하는것 같으면서도 옹호한다는 생각이 드는건 저만의 착각인가요..한나라의 4군현이 왜 한반도에 있죠? 역시 제홍씨님도 강단사학계의 논리에서 버서나지 못하셨네요..독립운동가들도 한사군은 만주에 있다고 말씀하셨고 재야사학계에서도 한사군은 만주나 북경 유역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왜자꾸 식민사관을 따라가시는지... 내 처음부터 헌원이 환웅이라고 할떄부터 예감이 들더군요..ㄷㄷ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3:35 #

    고고학 발굴 결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3:35 #

  • 알콩달콩 2012/05/07 13:43 # 답글

    ㅎㅎㅎ이제야 제홍씨님의 진실을 보여주시는군요^^ 잘알고 가겠습니다...댓글달 가치도 못 느겨보이는군요..그놈의 고고학은 무슨....얼어죽을 고고학..고고학이라고 같다 붙이기만 하면 다 진실인줄 아시나..^^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3:45 #

    진정하시기바랍니다. 먼저 이걸 봐주시기바랍니다. http://cafe.naver.com/nagwangfal/book2182654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3:45 #

    낙랑군 관련 유물 자료 전집
  • 해피뉴 2012/05/07 15:13 # 삭제 답글

    이블로그가 이런곳인줄 미처몰랏어요
    이젠 다시는 안오렵니다 수고하세요
  • 덧글 보다보니 2012/05/08 23:59 # 삭제 답글

    풍납토성이 백제꺼 아니면 누구꺼냐
  • 제홍씨帝鴻氏 2012/05/09 00:15 #

    풍납토성은 낙랑군의 한반도 지배 거점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9 00:16 #

    증거: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한강 유역에는 고대 국가가 형성되지못했음.
    낙랑군의 문화적 영향이 이 지역에 매우 강했음.
    풍납토성은 낙랑토성과 유사.
    낙랑군의 우수한 철기 군사력으로 인해 한반도는 영남지방과 북한강 상류 지역 빼고는 제대로된 부락이 자리잡지못하고
    황폐,야만적이 되버린 현상이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확인됨.
  • 의문 2014/08/21 22:46 # 삭제 답글

    자강도 근처에 왕검성을 비정하시는 것 같은데,
    왕성 정도의 규모라면 충분히 조사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런 조사된 곳이 없는 것 같네요.
    그리고 자강도 근처가 과연 왕성으로 삼기에 적합한 위치인지 의문이 드네요
    아시다시피 대부분 산지 지역이라 교통이 매우 불리한 면이 있었고, 가장 근접할 만한 곳이
    독로강 유역인데, 그곳도 왕성을 삼을만한 적합한 곳은 없다고 보여지네요.
    그리고 동천왕은 동쪽으로 천도해서 동처왕이 아니라. 동쪽에 흐르는 천에
    묘를 써서 동천왕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
  • 궁금증 2016/02/22 22:28 # 삭제 답글

    http://pds21.egloos.com/pds/201205/06/97/b0129297_4fa60c08df7d2.jpg 이 지도를 제작할때 무엇무엇 사료가 쓰였나요 ??
  • 궁금증 2016/02/22 22:28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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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증 2016/02/22 22:28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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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증 2016/02/22 22:29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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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증 2016/02/22 22:29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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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증 2016/02/22 22:29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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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2 22:2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2/22 22: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2/22 22: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2/22 22:4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2/22 22:4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2/22 22:45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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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2 22:4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궁금증 2016/02/22 22:45 # 삭제 답글

    http://pds21.egloos.com/pds/201205/06/97/b0129297_4fa60c08df7d2.jpg 이 지도를 제작할때 무엇무엇 사료가 쓰였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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