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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숨겨진 영웅, 공손도. 백제국의 조상이 되다. by 제홍씨帝鴻氏

삼국지의 숨겨진 영웅, 공손도. 백제국의 조상이 되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구이라고도 발음됨.)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대방(황해도)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 -
중국 정사 ‘북사’와 ‘수서‘의 백제전










요동태수 공손도

요동태수 공손도는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까지 요동반도를 지배하던

요동국의 초대 왕이며 삼국지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영걸이었다.

서기 189년 그는 동탁 세력의 지원을 받아 요동태수가 되었다.
서기 190년에 한나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요동 양평의 고인돌을 통해 왕이 된다는 계시를 신하들에게서 받고,

천자만이 하는 하늘에 제사하는 ‘천제’를 지내었다.




(요동의 고인돌. 이것이 공손도와 관련된 그 요동 양평의 고인돌인가?)


공손도는 한나라의 황제에게 복속하기를 거부하고, 요동국을

세워서 스스로 왕을 맡았고,

조조가 한나라의 황제 ‘헌제’의 명으로 공손도를 속국으로 삼기위해

공손도에게 도장을 수여하여 신하의 예를 표하라 하지만

공손도는 “내가 요동(遼東)에서 왕으로 지내는데 무슨 영녕(향후)인가!”

라고 말하며 도장을 병기창고에 버릴 정도로 요동국이 천자의 중국과는 관련없는

자주국임을 사방에 과시하였다.









중국 정사 ‘삼국지’를 보면 손권의 오나라에서는 공손씨의 요동국을

‘융족,맥족의 나라’로 보았는데,

이는 요동국을 중국과는 무관한 예맥족,오랑캐가 주류인 나라로 보는 것이다.

‘진서’ 지리지에서는 동이의 아홉 종족(구이九夷)이 공손도를 복종하여 섬겼다하여

요동국이 당시 매우 위세가 대단했으며, 중국과는 차별화를 선언한

동이계 나라였고, 만주,한반도의 동이족들이 그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공손도는 산동반도의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한반도의 황해도를 경략하여

대방군을 두고 낙랑군을 제어할 정도로 동북아에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이글루스 역밸러 황룡 제작 http://dragon233.egloos.com )

 

공손도는 북부여의 왕이자 고구려의 왕을 맡고 있는 위구태 혹은 신대왕 백고에게

자신의 일족의 여자를 시집보내어 혼인 동맹을 맺고,

요동 부산의 도적을 같이 토벌하여 깊은 유대 관계를 가졌다.


고구려에서 반란이 일어나 신대왕 위구태의 아들인 고국천왕(발기)이 망명왔을

때에는 고구려를 쳐서 버릇을 길들여주었고,

후일 신대왕의 아들인 연오(延烏)는 고구려를 떠나, 소시모리(강원 춘천)를

거치고 가야국에 정착하다 진한의 사로국(초기 신라)의 울산인들을 거느리고

일본열도의 이즈모에 상륙하여 왜왕 ‘스사노오(소서노,선견)’가 된다.

왜왕이 된 연오는 자신의 누이인 비미호(히미코)에게 왜국의 여왕을 하게하고.

자신은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가 유비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요동의 공손씨는 유비와 비미호 여왕의 아들인 공명(孔明)이 아버지를 찾아

바다를 건너가게해서 중국에서 제갈씨란 성을 쓰며 활동하게하며 유비를 보좌하여

책사로서 훌륭한 업적을 이루게한 후 촉나라를 떠나 요동국으로 가서 공명은

‘고모’,‘구모’,‘고이’,‘구이’로 불리며 요동국의 공손씨의 사위가 되어

공손씨의 군사들과 만주 혼강(비류수) 유역의 비류부를 거느리고 황해도의 대방군에

상륙하여 대방백제를 세우고, 한강 유역으로 내려가 백제국을 세우게된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구이라고도 발음됨.)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대방(황해도)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 -
중국 정사 ‘북사’와 ‘수서‘의 백제전








실로 요동의 공손씨는 만주는 물론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남긴 것이다.






* 관련 기록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이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며

사자 한충(韓忠)을 보내 선우(單于)의 인수(印綬)를 지니고 와서 초왕(峭王)에게 주었다. 초왕(峭王)이 뭇 장(長)들을 대거 모았고 한충 또한 그곳에 좌정하였다.

한충이 말했다, “우리 요동(遼東)은 창해(滄海)의 동쪽에 있으며 백만 군사를 끼고 또한

부여(扶餘), 예맥(濊貊)을 부리고 있소. 당금의 형세는 강한 자가 우선이니 어찌

조조(曹操)만 유독 옳단 말이오?” -삼국지 위서 견초전

"요동(遼東)의 9종(種)이 모두 복속하였다. 후한(後漢) 말에 공손탁(公孫度)이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였으며,
그 아들 강(康)과 강(康)의 아들 문의(文懿)는 모두 스스로 요동(遼東)에 웅거하니 동이(東夷)의 九種이 모두 복종하여 섬겼다."라고 했다.
-진서晉書 14. 지리지

"공손연(公孫淵)은 부조(父祖) 3대를 이어가며 요동(遼東)을 가졌다.

천자(天子)는 그곳이 절성(絶城)이라 하여 (그에게) 海外의 일을 위임하였다.

이에 드디어 동이(東夷)가 격단(隔斷)되어 제하(諸夏)와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초(景初:237~239)중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연(淵)을 주멸하고, 몰래 바다 건너 군대를 보내어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거두니,

이뒤부터는 海表가 평온해지고 동이(東夷)가 굴복하였다." -<삼국지> 30. <동이전> 서(序)

"환제-영제(桓帝-靈帝)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었다. 건안중(健安中:196~220)에

공손강(公孫康)은 둔유현(屯有縣)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등을 보내어 유민을 거두어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뒤부터 왜(倭)와 한(韓)이 대방군(帶方郡)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중(237~239)에
명제(明帝)가 비밀리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蘚于嗣)를 보내어 바다 건너 2군을 평정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

공손도(公孫度)는 자(字)가 승제(升濟)이고 본래 요동(遼東)군 양평(襄平)현 사람이다.
공손도(公孫度)의 부친인 공손연(公孫延)이 관리(吏)(의 추포)를 피해 (본래 고향인 요동군을 떠나)
현도(玄菟,유주 현도군)에 거주하였고 (현도군에서) 공손도를 임명해 군리(郡吏)로 삼았다.
당시 현도태수는 공손역(公孫琙)이었고 그의 아들 공손표(公孫豹)가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공손도가 어릴 때 이름이 표(豹)였고 또한 공손역의 아들과 같은 나이였으므로
공손역이 그를 만나보고 친애(親愛)하니 스승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고 처를 얻어 주었다. 그 뒤 유도(有道,후한 선거제 과목의 하나)로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郎)에 제수되었고 (※) 점차 관위가 올라 기주자사(冀州刺史)에까지 이르렀으나 요언(謠言,뜬 소문)으로 면직되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서영(徐榮)이 동탁(董卓)의 중랑장(中郞將)이 되자 공손도를 추천해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삼게 했다. (※)

공손도(公孫度)는 현도군의 소리(小吏,하급관리,아전)에서 시작했으므로 요동군(遼東郡) 사람들이 그를 경시했다.
당초 (요동)속국(屬國) 사람인 공손소(公孫昭)가 양평령(襄平令,요동군 양평현의 현령)을 지낼 때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불러
오장(伍長,하급직)으로 삼았었다. 공손도가 관직(즉, 요동태수)에 취임하자 공손소를 잡아들여 양평(襄平)의 저자에서 태형을 가해 죽였다.
(요동)군 내의 명호(名豪,이름난 호족), 대성(大姓,대가)인 전소(田韶) 등 평소 (자신을) 은혜롭게 대우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법에 따라 주살하니
이멸(夷滅,멸하여 없앰)시킨 것이 백여 가(家)에 이르러 군(郡) 중이 진율(震慄)했다.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驪)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烏丸)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海外)에 떨쳤다.

초평 원년(190년), 공손도(公孫度)는 중국(中國)이 어지러운 것을 알고 친임하는 관리(吏)인 유의(柳毅), 양의(陽儀) 등에게 말했다,
“한조(漢祚)가 장차 끊어지려 하니 응당 경들과 더불어 왕(王)(업)을 꾀하려 하오.” [1]
당시 양평(현) 연리(延里,리里의 이름)의 사(社,토지신을 모신 사묘社廟)에 큰 돌이 생겨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래로는 3개의 작은 돌이 있어 발(足)이 되었다. 어떤 이가 공손도에게 이르길, “이는 한나라 선제(宣帝) 때 관석(冠石)의 상서로운 조짐이며
(※) 리(里)의 이름이 선군(先君,선친.즉 공손연公孫延)과 같습니다. 사(社)는 토지를 주관하니 분명 토지를 가지게 되고 삼공(三公)의 보좌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공손도가 더욱 기뻐했다.

※ 冠石之祥 –「한서」권27 오행지 中之上 이나 권75 휴홍전 등에 의하면, 전한 소제(昭帝) 원봉(元鳳) 3년(B.C 78)에
태산(泰山) 내무산(萊蕪山) 남쪽에 큰 돌이 서 있는걸 발견했는데 높이 1장 5척, 크기 48위(圍,1위는 한아름)이고 땅 속에 8척 깊이로
박혀 있으며 돌 셋이 발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옛 고인돌이나 거석문화 흔적을 이때 발견한 것으로 보이며 위에 공손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휴홍(眭弘)이「춘추」의 뜻을 빌어 당시의 다른 징조들과 함께 이를 ‘필부가 천자가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가
집정하고 있던 곽광(霍光)의 미움을 사 혹세무민한 죄로 처형당하는데, 그 5년 뒤 무제의 증손인 선제(宣帝)가 민가에서 추대되어 황제가 되자 이를 그 징조가 증험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예전에 하내태수(河內太守)를 지냈던 이민(李敏)은 군(郡) 내에서 저명한 인물이었는데,
공손도의 소행을 증오하고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가속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손도가 대노해
그의 부친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그의 종족(宗族)들을 주살했다. [2]
요동군(遼東郡)을 갈라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설치하고 (※) 태수를 두었다.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청주 동래군)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遼東侯), 평주목(平州牧)에 오르고, 부친인 공손연(公孫延)을
건의후(建義侯)에 추봉(追封)했다.

한나라 2조(二祖,한고조 유방과 후한 광무제 유수)의 묘(廟,사당)를 세우고 승제(承制,천자의 명을 받들어 편의로 권한을 행사함,
주로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관작을 봉배하는 것을 일컬음)하였고 양평성(襄平城) 남쪽에 단선(壇墠,흙은 쌓아 만든
제단과 땅을 고른 제사터)을 설치하고 천지(天地)에 교사(郊祀,천자에 교외에서 천지에 지내던 제사)를 지냈다.
적전(藉田,제왕이 직접 밭을 갈던 의식), 치병(治兵,연병 의식)하고 난로(鸞路,제왕의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구류(九旒,아홉개 비단깃술로 장식한 천자의 깃발;아홉개의 술이 달린 관모冠帽)를 쓰고 모두(旄頭,천자의 의장행렬 중 선두에 서던 기병),
우기(羽騎,우림군 기병)를 부렸다. ※ 원굉(袁宏)의「후한기」– (초평 원년, 190년) 요동태수 공손도가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고 한나라 세조(世祖)의 묘(廟)를 세웠다. (遼東太守公孫度自號爲平州牧. 立漢世祖廟.)

태조(太祖,조조)가 표를 올려 공손도(公孫度)를 무위장군(武威將軍)으로 삼고 영녕향후(永寧鄕侯)에 봉하니 공손도가 말했다,
“내가 요동(遼東)에서 왕으로 지내는데 무슨 영녕(향후)인가!”
그리고는 인수(印綬)를 무고(武庫,무기고)에 넣어두었다. 공손도가 죽자 아들인 공손강(公孫康)이 그 지위를 이었고
영녕향후의 작위는 (공손강의) 동생인 공손공(公孫恭)에게 봉했다. 이 해가 건안 9년(204년)이다.
(※ 공손도 재위 : 189-204)[1]
「위서魏書」– 공손도(公孫度)가 유의(柳毅), 양의(陽儀)에게 이르길, 참서(讖書,참위서)에서 손등(孫登)이
응당 천자(天子)가 될 것이라 했는데 태수의 성(姓)이 공손(公孫)이고 자(字)가 승제(升濟)이며 升(승)은 즉 登(등)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공손도전

"당시 공손연(公孫淵)이 투항한 후에 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손권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정벌에 나서려고 했다.
설종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지금
요동에는 융족과 맥족의 작은 나라가 있고, 성이나 연못의 견고함과 방어하는 방법도 없으며
무기는 예리하지 않고, 군대는 개나 양처럼 규율이 없어 가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확실히 영명한 조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은 춥고 척박하여 곡식이 자리지 못하며, 백성들은 말 타기가 습관화되어 규율 없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대군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스스로 저항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깜짝 놀란 새나
짐승처럼 먼 곳으로 달아나 사람 한 명, 말 한 필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빈 빵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지켜서 이익이 없으므로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첫 번째 까닭입니다. 게다가 또 흐르는 물이 깊고 넓고,
성산의 험난한 곳도 있으며, 바다의 항해에도 일정함이 없고 풍랑을 면하기 어려워 순식간에 사람과 배는
특이한 형세를 만나게 됩니다. 비록 요순의 덕행이 있을지라도 지모는 사용할 곳이 없으며, 맹분과 하육의
용맹이 있을지라도 역량을 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게다가 짙은 안개가 하늘을 가득 덮고 있으며,
바닷물이 땅 속에서 증발하여 사람들은 쉽게 종기가 나, 서로 전염시킵니다. 바다를 건너는 자로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 자는 드뭅니다.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하늘은 신성한 천자를 내려보내고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 분명히 하고 반드시
환란을 평정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안녕되게 하도록 했습니다. 눈 앞의 길한 징조는 나날이 모여들고 있으니 천하는 장차 평정될 것이고,
천리를 거스른 자나 포악한 자의 멸망은 가까이 있습니다. 중국이 하나로 평정되면,
요동은 자연스럽게 멸망할 것이니,
단지 손을 잡고 기다릴 뿐입니다. 지금 필연적인 규율을 위배하면서 지극히 위태로운 험난함을 찾고, 구주의 안정을 홀시하고
하루아침의 분노를 발설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계책이 아니며, 또 창업 이래 일찍이 있은 적이 없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신하들이 몸을 기울여 탄식하고 먹어도 단맛을 모르며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우레와 같은 위세를 억누르고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인내하며, 교량을 지나는 것 같은 안전에
기대에 얇은 빙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험을 멀리한다면, 신하와 자제들은 당신의 복에 의지하고, 천하도 매우 행복해 할 것입니다."

-삼국지 오서 설종전



"左京 諸蕃 漢 常世 連 燕國王公孫淵之後也
右京 諸蕃 漢 常世 連 燕國王公孫淵之後也 "
-신찬성씨록


연국 왕 공손연의 후예가 기록된 일본의 신찬성씨록.


右京 諸蕃 百濟 麻田 連 百濟國朝鮮王淮之後也
-백제국 조선 왕 준의 후예가 기록된 일본의 신찬성씨록


덧글

  • 하니와 2012/05/07 09:06 # 삭제 답글

    헉, 김성호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09:10 #

    김성호? 전 김성호가 아닙니다만.
  • 독립적인 북극의눈물 2013/08/17 14:56 # 답글

    동명의 후손에 구태(구이라고도 발음됨. 고이왕을 지칭. 일명 구태백제, 또는 대방백제)
    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대방(황해도가 아니고 중국 요동의 대방군)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부여로부터)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 -중국 정사 ‘북사’와 ‘수서‘의 백제전

    고이왕은 우씨이니 부여출신이다, 그가 중국 요동 대방군에 나라를 세우니 대방백제, 또는 구태백제라 한다.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하여 대륙백제라고도 한다. 고이왕 후손으로 책계왕, 분서왕, 계왕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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