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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보는 사마의와 동천왕의 대결투 by 제홍씨帝鴻氏

삼국지 클라이막스 - 사마의와 동천왕의 대결투




                                         (고구려 동천왕의 위엄스러운 모습)



“위궁(동천왕)의 증조가 이름이 궁(宮:태조왕)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궁이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멸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의 왕(위궁:동천왕)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르는데,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고구려 위나라 전쟁의 발단



(지도: 중국 역사전문가 역갤러 '황룡' 제공)
(공손씨의 연나라(요동국) 멸망 전 동북아 정세도 : 중국 역사전문가 '황룡' 제공)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와서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하여 주부대가가 되어 5천명을 이끌고 남소로 출병하여서

관망하여 성원하게 하였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고나서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하여졌더니,

상이 노하여 사마의와의 교통을 끊었다.“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사초 동천왕기-


고구려 동천왕이 요동국을 위나라와 협력하여 부수었음에도

이에 대해 아무런 위나라의 보상조치가 없자 분개하여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가

악화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AD242)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16년(242)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제위 16년(서기 242년) 여름 5월, 상이 친히 5도 장군 방축,회고,주희,현,목장

등을 거느리고 10만 병을 이끌어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이다.

애초에 사마의가 요동을 빼앗고 이곳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제 그 설비가 파괴되었으니,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사초 동천왕기-


서안평은 압록강 하구로, 새로 세워진 위나라의 낙랑군과 인접해있고.

동천왕의 공격은 요동군과 낙랑군의 중간통신지점인 서안평을 부순 것,






즉 이것은 낙랑군에게 있어 큰 고립의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 악화로 낙랑(평안도)과 대방(황해도)

에 주둔한 위나라군대는 후방의 고구려로 인해 백제 공명왕(고이왕)과 싸울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마의가 공명왕과 싸우기위해 설치한 서안평 기지가

고구려의 것이 되었으니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사마중달의 계획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동천왕에

대해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궁(동천왕)의 증조가 이름이 궁(宮:태조왕)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궁이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멸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의 왕(위궁:동천왕)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르는데,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건만, 사마중달은 동천왕을 가소롭게여겨

요동 땅을 나눠먹지않다가 동천왕에게 백제정벌,낙랑군과의 통신을 위해

설치해둔 서안평을 빼앗겨버렸으니 자신의 숙적인 공명왕과 고구려의

연합을 도와주는 꼴만 되버렸다.


(지도: 중국 역사전문가 역갤러 '황룡' 제공)












서기 244년 고구려 위나라 1차 전쟁







“정시(正始: 제왕齊王 조방曹芳 240-248) 중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서기 244년. 고구려가 약탈하자 관구검이 토벌하였다.”

-관구검기공비-














서기 244년. 위나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요동을 위협하는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유주자사 관구검을 시켜 고구려를 침공하게한다.

당시 관구검은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고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관구검이 직접 거느린 군대는 보병,기병을 총합해 1만!

관구검은 속전속결의 전투를 택한 모양인지

고구려의 부수도 국내성이 가까운 비류수로 군대를 진격시킨다.

당시 관구검이 생각한 전술은 고구려의 여러 성들에 위나라 대군을

나누어 배치시켜 발을 묶어놓고

자신은 중앙군 1만을 이끌고 재빠르게 고구려 왕의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도,수도도 모두 사로잡으려는 계책이었다.


이제까지 중국 그리고 공손씨의 요동국이 고구려와 싸우면서

패퇴하거나 혹은 고구려를 끝장내지못했던 것은

중국 군대가 험준한 산악들에 위치한 고구려의 산성들로 진격하여

항상 산성하고만 대치하여 포위만 하고 승부는 보지 못하다가

겨울이 오거나 식량이 떨어져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려하면 그 때를 노려

퇴각하는 중국 군대를 추격해서 섬멸하고,

고구려와 인접한 중국의 군현들을 심심할때마다 약탈하여 노략질하고

중국인들을 납치해가기에 중국으로선 어떻게 승부를 볼 생각을 잘

내지 못해 고구려와는 화친을 강구햇다.

관구검은 이전 중국이 한 실패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속전속결의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의 동천왕은 보병,기병 합해 2만을 거느리고 관구검과 싸우러온다.

그런데 결과는 관구검의 패배였다.

관구검은 군사 3천명을 잃어버리고

나머지 7천명만을 거느린 채 군사를 물렸다.(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양맥곡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관구검은 3천 군사를 또 잃어버리고 만다.

남은 군사는 4천명 뿐이었다.

관구검은 급히 퇴각한다.(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왕(동천왕)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군이 도리어 우리의

소군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인데 오늘에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렸다.“ ”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인구수가 243만인 위나라에 비해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는 20만에 불과했다.
고구려의 인구수는 초기 고구려의 인구 3만호(15만)에 북옥저,남옥저까지 총합한 인구수로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위나라가 군사를 여러길로 나누어 고구려를 침에도 고구려의 어떤 성도

함락되지 않고 관구검이 이끄는 중앙군은 패퇴하기만 하니

동천왕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동천왕은 장수들에게 관구검의 연패를 조롱하고 바로 철기병 5천을

이끌고 내달려 관구검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쥐를 너무 궁지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관구검이 결사적인 장창 방진을 쳐서 철기병 5천에 저항한다.

동천왕과 철기병이 무리하게 관구검을 추격하다 결국 관구검이 쳐놓은

장창 방진에 걸려 도륙되어버리고 동천왕은 급히 퇴각한다.


이 과정에서 뒤따라오던 나머지 고구려 보,기군까지 총합해

1만 8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그러나 관구검도 피해가 크기에 일단 군사를 되돌리다.





서기 245년 고구려 위나라 2차 전쟁


















1차 침공에서 관구검과 고구려는 서로 큰 피해만을 보고

군사를 물렸다.

관구검은 다시 속전속결의 전술을 채택하여 고구려 수도를 기습공격

하기로 한다.

서기 245년 5월 2차 침공에서 관구검군대가 말발굽에 천을 싸매고

위험을 무릎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여

환도성을 기습 함락시킨다.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무구검(관구검)이 이를 추격해 혁현(䚂峴, 혁 고개)에 이르러

[※태평어람에는 赬(붉을 정) 통전에는 頳(=赬.붉을 정)으로 표기.중국정사조선전

북사 편 교감기 25번 참고]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했다.“ -「북사」(권94) 고구려전 -


“관구검이 (위궁을) 추격하여 적현(赤峴, 적 고개)에 이르렀고

현거속마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수했다.“

-(태평)「환우기」권173-



급작스런 관구검 군대의 기습에 놀란 동천왕은 급히 수도를 떠나

피신하고 관구검은 동천왕을 놓치고 만다.

정작 중요한 고구려 왕을 잡는데 실패하자

할 수 없이 관구검은 <관구검기공비>라고 기념비석만을 세우고

수도 환도성을 약탈하고 수천여 군사,백성들을 죽인 후 불지르고

퇴각한다.




관구검기공비가 근대에 이르러 발견이 되었는데.


그 기공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관구검 기공비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인용.

(판독문)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遺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
(번역)정시(正始) 3년(24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반(反)하자,7장군(將軍)을 거느리고 구려(句驪)를 토벌하였다.

5(年:244년에)(고구려가) 다시 구략(寇略)하자,
(토벌하고) 6년(245년) 5월에 (군사를) 돌이켰다.討寇將軍 巍烏丸單于▨威寇將軍 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244년의 전쟁은 비류수,양맥곡에서 벌어진 1차 위,려 전쟁이고,

245년에 관구검이 기공비를 환도성에 세운 후 군사를 회군시킨 전쟁은

관구검의 환도성 기습 함락이다.

관구검의 이 기습 함락 작전이 위나라에 널리 알려졌던 모양인가?

위나라의 등애,종회는 험준한 촉나라의 검각 요새를 우회하여 험하고 매우

높은 산악길을 힘겹게 지나간 끝에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를 기습하여

촉나라를 멸망시킨다.

관구검의 전술이 위나라의 전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을 듯 하다.





서기 246년 고구려 위나라 3차 전쟁



관구검은 이번엔 정말 확실히 승부를 보기 위해 다시 환도성을 공격한다.

고구려 동천왕은 군사가 없어서인지 맞서지 않고 남옥저로 퇴각한다.

서기 246년 봄 2월에 고구려를 다시 치다.(삼국지 권4 <삼소세기 제왕> 조방)

여름 5월에 예맥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삼국지 권4 <삼소세기> 제왕 조방)

동천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다.(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수도 환도성을 다시 점령한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남옥저의 매구로

달아난 동천왕을 추격하게하고

자신은 환도성의 산성의 험준한 지세에 머물러 왕기의 후방을 지켜주고

고구려의 지방군들을 견제한다.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2]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왕기는 추격하여 남옥저에 당도하여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명을

베어죽여버렸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본기를 보면 이 때 낙랑태수 유무도 고구려 토벌에

참가하였다.

아마 고구려의 왕을 사로잡는 공을 자신이 가지고싶었던 모양이다.

남옥저는 낙랑군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니..,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恆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중략)…

왕기(王頎)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그(→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



그런데 동천왕은 없고 북옥저로 달아났다고한다!

어떻게 북옥저로 달아났다는걸 그리 정확히 파악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왕기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왕기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따로 군대를 나누어 북옥저로 가게하고

자신은 남옥저에 머물러 산의 굴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동천왕을 찾기로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정확히 위나라의 군대는 세 부류로 나뉘었다.

환도성의 관구검군대, 남옥저의 왕기의 군대, 북옥저의 왕기의 부하장수의

군대.


이렇게 위나라 군대가 셋으로 쪼개어졌을 때 동천왕은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U style="text-underline: #0000ff single">魏軍(위군)</U>의 追擊(추격)은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므로, (왕은) 계책이 다하고

事勢(사세)가 꿀리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東部(동부) 사람 紐由(유유)가 나와 말하기를, "사세가 매우 위급하오니

헛되이 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臣(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으니, 飮食(음식)을 가지고 가서

魏軍(위군)을 대접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敵將(적장)을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臣(신)의 계책이 성공되거든 왕은 [敵(적)을] 奮擊(분격)하여

승리를 決(결)하소서" 하였다. 왕은 "그리하겠다" 하였다.

紐由(유유)가 魏軍側(위군측)에 가 거짓 항복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大國(대국)에 죄를 얻고 海濱(해빈)으로 도망하여 왔으나

몸을 둘 곳이 없어 장차 貴陣(귀진) 앞에 와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司寇[사구:司法官吏(사법관리)]에게 맡기려 하여

먼저 小臣(소신)을 보내어 변변치 못한 것이나마 드리어

從者(종자)의 飮食(음식)이나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U style="text-underline: #0000ff single">魏將(위장)</U>이 듣고 장차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할 때

紐由(유유)는 食器(식기) 속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어 魏將(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고구려 장수가 동천왕이 항복한다며 식사를 대접한다고 솥을

가져와 북옥저까지 추격해온 위나라 장군에게 대접하다가 솥에서

칼을 꺼내 찌르자 위나라 장군이 죽는다.

그렇게하여 위나라 군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동천왕이 기습하여

북옥저의 위나라군들을 쳐부순다.

그리고 동천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위나라 군대들을 친다.

“魏軍(위군)은 드디어 어지러워졌다. (이 때)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陳(진)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樂浪[낙랑:平安南道(평안남도)] 방면을 거쳐서 <U style="text-underline: #0000ff single">退去(퇴거)하였다.</U>○“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즉 관구검,왕기,북옥저까지 추격해온 위나라 군대 이 세 부류를 나누어서

협공 작전을 펼친 것이다.







도대체 북옥저 끝까지 쫓기던 동천왕이 무슨 군대가 있다고 갑자기

이렇게 세 갈래 진공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동천왕이 쫓기던 건 떡밥이었던 것이다.


마침 겨울 10월이라 계절이 추운 때여서 위나라 군대들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매우 불리해지자 관구검 등 위나라 군대는

북쪽 길이 고구려 지방군에 의해 모두 막혀 급히 낙랑 방면으로 도주하였으나

마침 백제의 공명왕(고이왕)이 고구려 구원에 나서서

낙랑태수 유무가 동천왕을 잡으러간 때를 틈타 낙랑군을 공격하던 때라

놀란 관구검은 공명왕을 피해 요동으로 도망간다.









“서기 246년 가을 8월에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 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치니,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 백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무가 듣고 노하니 왕은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본기-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과 전쟁하는 사이 공명왕이 낙랑군을 기습해서

약탈한다.






결국 관구검은 속전속결에만 연연하다 동천왕에게 허를 찔려버리고

동천왕에게 빼앗긴 서안평도 수복치못한 채 도망가고만 것이다.

동천왕은 관구검을 더 이상 쫓지 않는다.

왜였을까? 잡았을 수도 있을텐데?


추격하다가 피,살과도 같은 철기병 5천을 순식간에 몽땅

잃어버린 뼈저린 사건이 있으니

동천왕은 아마 그로 인해 추격공포증에 걸렸던 것 같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백제와의 전쟁에서도 참패한 위나라는

수치를 그대로 적지 못했다.


그래서 위나라에선 전쟁의 전말에 대해서 매우 이상하게 기록해버린다.

서기 246년 백제에게 낙랑군이 약탈당한건 전혀 기록하지않고

서기 244년에 1차 위,려 전쟁에서 비류수,양맥곡에서 벌어진 전투를

위나라의 대승이라고만 적고,

관구검기공비가 환도성을 처음 함락했던 245년에 세워졌음에도

환도성 함락을 244년으로 왜곡하고,

246년에 남옥저,북옥저로 동천왕을 추격한걸 245년에 수도를

함락한 직후 일어난 일처럼 적어놓고

북옥저로 추격하던 위나라 군대가 궤멸했다든가, 관구검,왕기가

세 갈래로 진격하는 고구려 군대에게 패퇴하였다는건 전혀 적지 않거나

마지막 전쟁의 연도인 서기 246년 조차 언급하지 않고

마치 서기 245년에 환도성함락하고 동천왕을 추격만 하게하다가

그냥 평화롭게 군사를 회군시켜놨다는듯이 적고있다.

하지만 실상을 알아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관구검전에서 관구검은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유주자사 직에서 물러나

오나라 방면으로 좌천당한 후에 위나라의 사마씨에게 반역을 모의하다 참수된다.


고구려 동천왕은 서기 248년 9월에 사망한다 위나라와의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죽은 걸 수 있다.

흔히 후세 사람들은 동천왕이 위나라에게 수도를 점령하고 쫓겼다는 것만

듣고 동천왕을 못난 사람,패배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상을 알아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에게 있어서도 동천왕은 그의 무덤에 순장되고싶을 정도로

고구려에 있어 영웅 그 자체였다.


“○ 9월에 왕이 돌아가니 柴原(시원)에 장사하고 廟號(묘호)를 東川王(동천왕)이라

하였다. ○ (이 때) 나라 사람들이 왕의 恩德(은덕)을 생각하여 서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近臣(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殉葬(순장)하려 하는 자가 많았다.

嗣王(사왕)은 禮(예)가 아니라 하여 금하였으나,

葬日(장일)에 陵(능)에 와서 殉死(순사)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柴(시)]을 베어 그 屍體(시체)를 덮어 주고 드디어

그 곳을 柴原(시원)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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