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풍후 애드센스


서기 3세기 초 대방군 설립,비류부의 한강 점령(백제의 기반이 닦여지다.) by 제홍씨帝鴻氏

서기 3세기 초 대방군 설립,비류부의 한강 점령(백제의 기반이 닦여지다.)







                                         (이글루스 역밸러 황룡 제작 http://dragon233.egloos.com )


서기 3세기 초 고구려에서는 큰 내분이 일어난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가 이 기회를 노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백고(신대왕)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 작은 아들은 이이모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망명한 호족胡族 5백여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서기 196~서기 219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부(비류부)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
(집안 환도,국내성)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편


고구려에서 신대왕이 사망하자 산상왕이 즉위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신대왕과 산상왕 사이에 고국천왕을
넣지만 삼국지는 그런걸 기록하지않았다. 삼국사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삼국지가 더 연대가 오래 되어서 신빙성이
더 높은 사료이기 때문이다.)









산상왕의 즉위에 반기를 품은 산상왕의 형이자 고구려 왕자인 발기가 비류부(소노부) 군사들을 이끌고 거병한다.
발기의 외가는 비류부(소노부)였던 듯 하다.




산상왕은 연나부의 도움을 받으며 발기의 난을 겨우 물리치고 발기는 비류부(소노부) 대가들과 함께 하호 3만명을 이끌고
요동국의 왕인 공손강 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공손강은 요동 군사들을 이끌고 발기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를 대파시키고 발기와 비류부를 다시
비류수(혼강의 지류)가 흐르는 졸본 일대에 머무르게 하여 제2의 고구려를 세우게한다.


                                                            (고구려를 토벌하자! 이랴!)


졸본이 중심지를 두고있던 산상왕의 고구려는 요동의 침입으로 크게 패하여 도망쳐 고구려의 제2의 중심지인 집안(국내성)으로
도피해 '환도성' 산성山城을 쌓고 요동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항전 운동을 하여 얼마 안돼 졸본 유역을 되찾고
발기를 몰아낸다.

발기는 다시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간다. 비류부도 이때 다시 많은 숫자가 요동으로 대피했을 것인데.
이들은 그 후 어디로 갔을까.



"후한의 환제,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서기 196~서기 220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예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편


똑같은 건안 연간의 시기인 서기 196~서기 220년에 요동태수 혹은 요동국의 왕인 공손강은 공손모,장창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드는데. 오늘날의 북한 황해도 지역이다. 1)
공손모,장창은 군대를 일으켜서 마한,동예를 정벌하여 한漢의 유민들을 구출해낸다.





                                                 (한나라 군대 고증)


                                                       (한나라 장군 고증)


앞서 삼국지 시대 초기인 서기 2세기 말 후한(後漢 후기 한나라) 제국의 환제,영제 말기에 마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한나라의 낙랑군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낙랑군의 군사력은 거의 유명무실해진다.
그러자 낙랑군의 많은 한나라계 백성,조선계 백성이 마한,동예에게 포로로 끌려갔다.

공손강은 낙랑군의 군사력이 약화되어 한반도에서 혼란이 벌어지는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군대를 파견하여
낙랑군을 대신하는 대방군을 설치하여 낙랑군도 대방군에 소속되게하고 대방군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지배하게하고
동방 열국의 무역 체제도 대방군을 중심으로 움직이게한다. 그러자 왜국과 마한,진한,변한이 모두 대방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 체계에 복종했다.

이 시기 서기 3세기 초까지 계속되던 낙랑군의 귀틀무덤 단계가 막을 내리고 벽돌무덤 단계가 등장하게되는데.
이 벽돌무덤은 공손씨의 요동국(요동군)에서 쓰인 무덤 양식이었다.


이 서기 3세기 초의 시기에 갑자기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게 고구려계 무덤 양식인 적석총 집단이었다.


                                                          (서울 석촌동 적석총 고분)


서울 석촌동에서 3세기부터 축조된 돌무지 무덤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돌무지무덤와 관련이 있는 것은
이 돌무지무덤이 3세기에 한강유역으로 도래해온 고구려의 비류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비류 계열의 돌무지무덤이 주로 한강 유역에 조성된 반면, 비류 계열에 반대되는

공손씨 계열은 평안도,황해도에 그들의 전실묘(벽돌덧널무덤)를 조성하였다.



그랬다. 고구려의 비류부는 연나부,계루부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공손씨의 요동국에 망명한 후
공손씨는 고구려의 비류부가 한강 유역에 이주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공손씨의 대방군이 한강 유역의 국가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한 토착 부락들을 소탕한 후 비류부가 그 일대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 설화에선 백제의 시조는 비류이며 비류의 어머니는 소서노라고 적고있다.
고구려에서 비류부는 '소노부'라고 불리기도한다. (소서노, 소노의 발음 유사성. 비류와 비류부의 이름 똑같음!)
비류,소서노는 설화에선 고구려 제1대 주몽왕과 혈연 연결이 되는
인물들로 나오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주몽본기 어디에서도 그런 기록은 나오지않으며
설화 내용대로 기원전 18년에 소서노,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한강 유역으로 이동해 백제를 세웠다면 한반도에
고구려 적석총 집단의 이동이 확인되어야하나 기원전 2세기~서기 2세기 말까지 그런 현상은 고고학적으로 전혀
확인되지않으며 한강유역에서 적석총은 3세기 초에야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원전 2세기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온조,비류의 초기 백제 건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기원전 2세기 말에 북한 평양에 세워진 낙랑군이 그들의 중심지에 낙랑토성을 축조하고 한반도를 지배하기위해
한강 유역에도 기원전 2세기에 풍납토성을 축조하고 한강 유역의 부락들을 낙랑군에 소속되게 했다고 봄이 옳으며
기원전 2세기~서기 2세기 말까지 한강 유역에 백제라고 불릴만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도
허구가 상당히 많다.


                                                  (기원전 2세기에 축조된 풍납토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비류부의 성씨는 해씨(解氏)로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초기 주요 귀족으로
대방군 계통의 진씨(眞氏),부여 계통의 여씨(餘氏),고이왕 계통의 우씨(優氏)와 함께 해씨(解氏)가 등장한다.






1) “공손씨가 낙랑군의 실질적 지배집단으로 된 후, 낙랑군의 남방에 대방군을

설치한 3세기 초부터 대방군지로 추정되는 황해도 일대에서

궁륭형 전천장 전실묘(벽돌덧널무덤)가 다수 조영되었다. (...)

전실묘의 구축 기술상으로 상당히 완성된 구조의 전실묘가

당초부터 황해도 일대에 조영된 점은 대방군지의 전실묘는 신래자(新來者:새로 온 사람)

에 의해 도입되었음을 나타낸다. 대방군으로 들어온 신래자는

공손씨 휘하에 있으면서 대방군의 지배세력으로 요동이나 산동 일대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고, 그곳에서 유행하는 전실묘 구조와 형식이 황해도 일대에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황해도 일대뿐만 아니라 낙랑군의 중심지인 평양 일대의 전실묘도 3세기

전반부터 궁륭형 전천장 전실묘가 조영되어 황해도 일대에 조영된 전실묘와 동일한

형식을 나타낸다. 이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산동과 요동 일대를 지배한 공손씨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나타난 전실묘 형식이다(...) 궁륭형 전천장 전실묘는 산동과 요동,

특히 요동 일대 전실묘에 그 계통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세기 전반부터 낙랑,대방의 지배층의 고분이 중원이 아닌 산동과 요동 일대의 분묘

형식을 수용하였다.“(횡혈식석실분의 수용과 고구려 사회의 변화 107~119p :동북아역사재단 , 권오영 외 지음)




덧글

  • 황룡 2012/05/07 11:43 # 답글

    두번째 지도에서 낙랑이 왜 고굴꺼냐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1:59 #

    음. 오류군. 곧바로 수정하겟네 허허! 고마우이!
  • 2012/05/07 11: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1:59 #

    음. 탁군이 공손찬의 영역으로 그려지다니. 흐음. 이 부분이 틀렷군. 하지만 고치기 귀찮군. 알려줘서 고마우이 허헛
  • 황룡 2012/05/07 12:18 # 답글

    원소위에 보라색은 무엇인고? 저런땅은 없다네 허허 그리고 청주도 이미 공손찬,원소의 세력화되면서 공손도가 진출한 산둥은 사라졌다네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2:20 #

    허허 시기상 단계별로 그리기 귀찮아서 그냥 산동 표시했다네 껄껄. 그리고 보라색은 그냥 한漢의 영토임을 표시한걸세 껄껄!
  • 2012/05/07 13: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7 13:39 #

    흐하하하하하하허허핳허하하하핫! 고마우이! 허허허허허허허허하하하하하하하핫!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