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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 기사에 나오는 요서백제 정벌 by 제홍씨帝鴻氏

※※※ 이 글은 모두 동서방제국 연표로 옮겨적었습니다.




광개토태왕비 기사에 나오는 요서백제 정벌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토록 하여...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ㅁ성.... □□□□□□□□. .
-광개토태왕비



정미(丁未)년은 후연 모용희의 제위 서기 407년. 건시(建始) 1년, 백제 전지왕 3년이다.






서기 407년 광개토태왕은 보,기 5만을 이끌고 어디론가로 친히 원정을 떠난다. 그리고 1만이나 되는 적군을
토벌하여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는 엄청난 전과를 얻는다. 개갑 1만...이란 단어가 나오는 걸로 보아
상대는 엄청나게 중무장한 매우 강한 군대였던 것 같다. 광개토는 이들을 모조리 전멸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6개의 성을 파괴한다.

광개토왕의 정복 대상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비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글자가 좀 많아서 그 구체적인걸 파악하기
힘들지만 추리해보자.

17년 정미년 조의 광개토의 정벌대상 국가에 대해 이마니시 류는 왜倭로 보았지만 근거가 없다.
삼택미길,박시형,김석형은 백제라 보았지만 왕건군은 백제 쪽에 기록이 없다고 반박했으니 왕건군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백제는 이미 앞서 광개토에게 항복하고 왕족,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기에 그들 자력으론 전투가 불가하다.
고로 광개토가 나서서 백제 만여 군대를 토벌했다는건 이치에 안 맞다.






정두희,천관우는 후연이라 봤다. 서기 403년에 고구려의 후연 숙군성 공격이 있었고 (자치통감)
후연은 스스로 내분으로 서기 409년에 멸망한다. 덕흥리 고분 벽화의 유주자사 진의 고분에서 광개토가 북경 일대인
유주를 정복하고 무덤의 주인인 '진'이란 인물을 유주자사로 파견해서 북경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유주자사 진의 사망 연도가 서기 408년이다. 광개토 드라마에선 후연 멸망과 비슷한 시기에 진이 죽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유주를 정복하고 후연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유주자사 진이 후연 자객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드라마로 추리하였다.











서기 408년에 유주자사 진이 죽은걸 보면 광개토태왕비의 서기 407년 기사의 "사방에서 포위했다.(사방합전四方合戰)"
는건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을 함락하여 요서에서부터 서쪽으로 후연의 용성을 압박하고 서쪽의 유주를 장악하여
후연의 중요 자본 기지를 장악함으로써 사방으로 후연을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모두 일치되고있다.



그렇다..!



광개토태왕의 서기 407년 정복 대상은 후연이었다.....!



태왕비에 서기 407년 이전의 서기 400년 부터의 후연과의 신성 전투,요동성 전투가 안 나오는건 고구려가 침범을
당한 전투여서 일부러 안 적은거고 고구려의 숙군성 정벌은 그냥 '사방 포위'라는 말 속에 함축 포함시켜버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누성을 격파했다....라고 하는 태왕비의 기사가 늘 의문이 되어왔다. '사구성','누성'의 이름은
후연에선 안 쓰이는 백제의 성 이름임을 태왕비를 통해 알 수 있다는게 백제사 전문가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었다.


"영락 17년조(정미 17년)의 전쟁은 백제와의 전쟁이다. .....고구려에 공파된 사구성이나 루성과 같은 지명...,
이 가운데 루성은 영락 6년조의 고구려에 공파된 백제의 58성 가운데 보이는 모루성,고모루성,▲루성,여누성 등
이른바 루자 계통의 지명과의 관련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락 17년조(정미 17년)에
고구려군이 공파한 사구성,루성,▲성,▲성 등 4개의 성에다가 결락된 부분에 2개의 성명을 넣으면 도합 6성이 된다.
광개토왕은 능비문 상 64성을 공파하였는데 영락 6년에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에다 영락 17년에 획득한 6성을
합치게 되면 공교로울만큼 64성이 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오로지 백제로부터 64성을 공취한게 되며.....
사구성과 루성의 위치를 정확히 구명하기는 어렵다."
- 이도학의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이런 점 때문에 다시 학자들은 이것이 후연인지 백제인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왜냐고?


비문을 자세히 보라. 개갑을 입은 1만 적군을 격파한 광개토는 '돌아오는 길'에 6개의 성을 파괴한다.
애초에 1만 적군과 전투하는거랑 6개의 성을 공파하는건 서로 다른 개념의 전투였다.
6개의 성을 공파하는건 돌아오는 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후연의 성이라면 '루'자 이름 돌림을 성 이름으로 쓰는게 이상하다. 고로 이것은 후연의 요서에 있는 백제의 지배 거점들이었던
것이다. 즉 사료에 나오는 백제의 요서 진평군....!


다시 비문을 보자.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토록 하여.. □□□□□□□□.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ㅁ성... □□□□□□□□. ..
-광개토태왕비



여기서 전반부에 □□□□□□□□. 으로 지워진 글자의 정체...! 아마 이런 내용일듯 싶다. 보,기 5만이란 숫자는
앞서 서기 400년에 신라에 침입한 왜倭를 토벌할 때 보냈던 군사 숫자와 일치한다.
고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도 메꾸도록 하자.


"정미 17년(서기 407년)에 보,기 5만을 보내 백잔 혹은 왜의 요서 거점을 토벌토록하여 왜와 화통한 후연을
정벌토록하였다.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ㅁ성으로 모두 백잔(혹은 왜倭)의 성이다."







덧글

  • 날치 2012/05/09 20:40 # 삭제 답글

    저도 407년은 당연히 후연이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9 23:00 #

    ㅎㅎ 넵
  • 늴리리야 2012/05/09 20:58 # 삭제 답글

    문제는 역사에 "가정"을 하는건 너무 위험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상대가 100잘못한거처럼 보여도 법적근거로 유죄를 증명해야하고 아무리 심증이 100이라도 명백한 증거가 확보되야하듯이
    역사도 마찬가지인거지요. 정말 흥미롭고 저도 님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이글을 반대하는사람들이 이건 그저 유추일뿐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는 글이에요. 비록 추측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지만 무척 흥미로운 가설 잘 보고 갑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09 23:00 #

    ㅎㅎ 네. 감사합니다. 저도 완전 100% 단정하는 건 아닙니다.
  • 태왕 2012/06/03 14:08 # 삭제 답글

    님아 죄송하지만 백잔이 아니라 후연혹은 연이라 해야 맞습니다 또 유주13군은 북평.어양.상곡.대군.광령.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요서.범양.연군인데다가 75현을 포함시켜 유주.13군.75현이라 하심이........
  • 제홍씨帝鴻氏 2012/06/05 04:29 #

    무슨 말씀이신지요? 허헛!
  • 태왕 2012/06/03 14:08 # 삭제 답글

    님아 죄송하지만 백잔은 백제니까 백잔이 아니라 후연혹은 연이라 해야 맞습니다 또 유주13군은 북평.어양.상곡.대군.광령.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요서.범양.연군인데다가 75현을 포함시켜 유주.13군.75현이라 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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