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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은 선비족 출신 왕자다 1편 by 제홍씨帝鴻氏

광개토태왕은 선비족 출신 왕자다 1편







광개토왕에겐 선비족 모용씨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증거로 첫째. 광개토태왕비에 후연에 관한 문구는 단1번 딱 한문장으로만나오고
나머지는 다 백제 왜가 주적이다.

근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후연 백제가 중요한 주적으로 나온다.
이는 광개토태왕비하고는 영 딴판이다.



왜 그럴까?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현도의 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그의 아우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 두 군(郡)을 다시 회복하였다.

모용수가 죽자 아들인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대방(帶方) 2국의 왕으로 봉하였으며,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요동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後略有遼東郡)."
- 양서(梁書)』권54 고구려전과 『북사(北史)』권94 고려전(高麗傳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 후연의 황제 모용보는 광개토태왕의 재위 초년에 요동.대방 2국 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에서의 요동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는 애초에 힘들여 후연을 쳐 요동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후연이 고구려에게 줄 정도로 당시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는 친하였고 그 사이에는 '안安(광개토태왕)이란 존재가 있었다.

광개토태왕비에서도 그런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가에 이르러
패려(稗麗) 3부락의 6, 7백영(營)을 공파하고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으며, 양평도(襄平道)로 개선하는 길에
역성(力城)·북풍(北豊) 등의 토경(土境)을 순수(巡狩)하였다"
-광개토왕비문의 영락5년(395)조

한(漢)나라 시대의 요동군 치소였던 '양평(襄平)'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현이고 '역성(力城)'은 『진서』지리지에 의하면
양평과 함께 요동국(遼東國)의 속현(屬縣)의 하나이며, 또 '북풍(北豊)'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현 서북쪽에 있었다고 하므로,
서기 395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요동의 중심 양평 땅을 제 맘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 그 전에 광개토태왕이 요동을 장악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중국 한국 일본 사료 금석문 어디에서도
광개토태왕이 무력으로 요동을 취했다는건 찾아볼 수 없다.
광개토태왕은 양서,북사의 기록대로 모용보에게서 요동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양서,북사의 기록에서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책봉을 받는 신하로서 적힌다는거고 광개토태왕도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거다.

광개토태왕이 재위 초년 벌써부터 마음놓고 백제를 때릴 정도로 양국 관계가 화평했다는 점도 광개토태왕이 후연의
책봉을 받고 신하가 되었음을 뜻한다.

어떻게 고구려가 후연의 신하국이 되고 후연은 고구려를 믿을 수 있게 되엇는가?




(고구려 고분 벽화의 4~5세기 고구려 무사)




고국원왕 시기인 서기 4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수도가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에게 털리고 5만 인구가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구려 고국원왕의 태후와 고국원왕의 왕비도 끌려갔다.
(전연前燕은 후연後燕 이전의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다.)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이련이 이 당시 모용씨에게로 인질로 끌려갓엇다가
후에 풀려낫다는 내용과 모용씨에게로 끌려간 왕비의 소생이 이련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帝:고국양왕)는 이름이 이련, 또는 어지지이고 수림의 동복 아우이다. 해 태후가 꿈에 용산龍山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으로 추정)이 해 태후의
승은을 입고나서 생겼다. 이에 점을 보는 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더니
주 태후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이련)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모용황 도적의 난리 중에 제(帝:고국양왕)는
해 태후를 따라서 연燕으로 끌려 갔었다. 모용황은 해 태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帝는 높이 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나라>의 다른 사람들은 모용황에게
제(帝: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으나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어찌하려다보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
라 말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보냈다
."-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봄 정원에 해씨가 왕자 이련을 낳았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비록 모용황의 침입 이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해에 모용황의 침입,환도성 함락,5만 포로사로잡힘 사건이
있었는지라 해태후가 모용황에게 끌려가 강간당하고 이련을 낳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관들이 거짓을 기록하여
왕실의 수치를 가렸을 수 있다.)

"서기 342년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주 태후를 포로로 사로잡은 후) 주 태후의 조서로써
아군과 백성들이
막아서지못하게 하였다. 상 또한 잡혀 있는 모친이신 주 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도 없었고 이리하여 적들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갔다."
-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왕비가 꿈을 꾸는 기록이 있는데. 모용황에게 강간당해 이련을 낳는다는 꿈 내용도 적혀있다.

또 이련의 왕비가 담덕을 낳을때 사슴과 교미한다는 이상한 내용이 있다. 사슴은 몽고 유목민족과 만주 부여족의 토템이다.
(당시 요서 전연前燕에 부여 왕족,부여인들이 연나라 사람들과 혼혈하여 라마동 고분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련의 왕비가 라마동 고분군 집단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자, 이를 쉽게 말하자면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는 고국양왕(이련)이고 이련의 어머니는 고국원왕의 왕비(아내)로
전연에게 포로로 끌려갔었다. 이 아내의 소생이 바로 이련이다. 이 과정에서 이련의 어머니가 모용황에게 강간당해
이련을 낳았거나 이련도 어머니와 함께 끌려가서 전연에서 살다가 이련 어머니는 모용황에게 강간당하고
이련은 선비족 출신 여자 혹은 부여계 선비족 출신 여자(라마동 고분군 집단)를 맞이했을 수 있다.



즉 광개토태왕은 선비족의 피가 흐르고있는 인물이다.





고구려 환도성 수도가 전연의 모용황에게 함락. 남녀 5만구가 인질로 노획. (342년)

고구려는 전연과 조공과 책봉 관계를 맺음. (355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되는 370년까지 고구려와 전연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




그에 실제 고고학적 증거도 이런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4세기 중엽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고국원왕부터 소수림왕,고국양왕까지의 고구려 고분군에서
'삼연 문화(三燕 文化:3개의 연 즉 전연,후연,북연)' 즉 전연의 문화가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증거유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전연 계통의 장식구,마구류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고구려 고분군단계(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르면 마구류 장식구에서 삼연문화의 영향이
더욱 더 커진다.
중장기병은 광개토태왕 당시의 고분군들에서 출현하는데.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모용씨 삼연문화의 중장기병을 복사해서 가져온 것임이 드러났다.




(고구려 중장기병 : 고구려 4세기 황해도 안악 고분 벽화)



(고구려의 마구)




(삼연 문화 조양 십이대영자 88M1 무덤에서 출토된 삼연 문화 마면투구)



(삼연 문화 조양 십이대영자 88M1 무덤에서 출토된 삼연 문화 마면투구)



(삼연문화 중장기병의 비늘갑주. 광개토태왕비에도 후연의 군대는 개갑기병으로 묘사되어 있다. )




(삼연 중장기병)





(삼연 문화 말 안장)



(삼연문화 황금관(금제 보요관) )





"고구려의 4,5세기대 고분에서 보이는 삼연 요소는 주로 전연 시기에 국한된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중국 삼연 요소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 강현숙 (국회전자도서관)



"(4세기 초~4세기 중엽의 고구려 무덤의) 전반부에 해당되는 무덤은 서대총과 우산하 992호분 두 예가
대표적이며 이들 무덤은 규형 보요 장식과 각종 금제 장식판이 부장품의 중심이 된다.
이 중 우산하 992호분의 사엽형 장식판은 라마동 379호분 출토품과 크기와 형태에서 같은 양상이며,
입식이 달리지 않은 화판형 운주는 라마동 266호분 출토품과 동형이다.
한편 규형 보요가 달린 이식은 우산하 3283호분 한 예 뿐이나 라마동 266호분과 379호분,
첨초구 1,2호분 등 삼연의 2단계 무덤에서 출토된 이식과 유사한 착장방식이다.
때문에 고구려 둘째 단계의 전반부에 부장된 규형 보요가 달린 장신구나 장식판,화판형 운주는 양 지역에서
서로 특징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라마동 266호분과 북표 대판영자 1호분에서도 출토된 두식(頭飾)과
동형의 두식은 우산하 3160호분에서도 출토되었다. .......
둘째 단계 후반기 부장품(4세기 중엽의 고구려 무덤)은 전반부보다 다종다양하다. 먼저 청자 반구호는
삼연에서의 부장 예가 보고되지 않았으며 초두는 양 지역에서 공통되나(고구려 칠성산 96호분, 삼연은 원대자 벽화분과
북표 창량교 무덤) 손잡이의 용머리 표현이나 동체의 융기선,다리 모양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 .......
마구는 삼연과 특징을 공유한다. 가령 칠성산 96호분의 경판은 가로가 약간 긴 원형 철판에 금동판을 덧씌운 것으로,
이와 유사한 경판은 조양 삼합성묘,왕자분산 요아영자 9001,원대자 벽화분에서 관찰된다.
... 칠성산 96호분의 안교는 다리가 높고 상변이 직선에 가까운 형태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안교는
안양 효민둔 154호분과 삼합성,원대자 벽화분,십이대전창 88M1호분 등에서 확인되었다.
삼연의 것은 다리가 안쪽으로 약간 휜 것으로, 직선 다리를 가진 고구려 안교보다 기능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고구려 안교가 삼연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무리 없을 것이다.
... 등자는 답수부가 약간 돌출된 것으로 칠성산 96호분과 셋째 단계의 태왕릉 출토품이 유사 형태이며,
삼연의 안양 효민둔 154호분이나 조양 십이대전창 88M1호분 등자와도 유사하다.
...... 이외에도 말 장식구로는 행엽과 운주가 있다. 먼저, 행엽은 칠성산 96호분이나 우산하 2891호분에서
확인되는 반면, 이와 동형의 행엽은 조양 십이대전창 88M1호분 한 예 뿐이다.
.... 운주는 두 종류가 있는데 반구상의 화판형 위에 보요가 달린 것으로, 서대총,우산하 992호분과
우산하 3231호,3560,3283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화판은 8-10판이다. 다른 하나는 반구형에 입식이 달린
것으로 우산하 3105호분과 289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화판형은 삼연과 공통되지만, 입식이 달린 반구형 운주는
착장 방법에서 삼연과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중국 삼연 요소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 강현숙 (국회전자도서관)





"(4세기 말부터 5세기대에 걸친) 고구려 고분은 삼연의 4단계에 해당되는 후연과 북연 시기이다.
이 단계의 고구려는 석실적석총과 석실봉토벽화분이 축조되었던 시기로, 부장품에서는 보요 장신구의 부장과
마구의 장식성이 증가된다. 한편, 권운문 와당이 무덤에 사용되지 않으며, 중원계 문물이 관찰되지 않는다.
이 시기 고구려 부장품을 대표하는 기종으로는 시유된 사이전연호와 화덕으로, 이 두 기종에서 삼연과의
관련은 관찰되지 않지만, 금속기를 대신하여 토제 시루와 솥이 부장된다는 점에서는 삼연과 특징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삼연과의 특징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것은 마구로, 이 단계의 마구로는 안교와 등자,행엽,방울,입식부 운주
등이 있다. ......... 이외에도 실물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이 단계의 마선구 1호분이나
통구 12호분,덕흥리고분,삼실총 등 벽화분에 표현된 중장기병에서 보이는 갑옷과 마갑,호록 등은 삼연의
3단계 무덤에 부장되고 있으므로 중장기마병과 관련된 유물들은 삼연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고구려 장신구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삼엽문 모티브는 삼연에서 유행한 것이며, 고구려 관식에서
보이는 우모 기법도 북표 서관영자 1호분에서 유례가 있으므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중국 삼연 요소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 강현숙 (국회전자도서관)


"셋째 단계는 권운문 와당 대신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는 4세기 말부터 5세기대까지의 시기이다.
... 태왕릉의 행엽은 고리의 폭이 넓으나 못의 배치가 많다. .... 태왕릉의 등자.... (4세기 말부터 5세기 대까지의
고구려 무덤에선) 중원과의 관련을 보여주었던 초두와 정 등의 금속제 용기와 용문 투조의 진식대금구의 부장은
관찰되지 않으며, 전 단계에 보였던 규형 보요 장식이나 명문 권운문 와당은 사라졌다.
반면 북방계 유물은 지속적으로 부장된다. 마구의 장식성은 더욱 증가하여 재질에서 뿐 아니라 장식 마구 뿐 아니라
장식 효과를 꾀한 행엽이나 등자,안교가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보요 장식 장식구와 투조 장식판의 부장이
두드러지며, 원형 보요가 중심을 이룬다. 이외에도 태왕릉에서는 청동 화덕과 동탁,만가,안족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장속으로는 우산하 41호분에서는 철모의 훼기가 관찰된다."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중국 삼연 요소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 강현숙 (국회전자도서관)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의 고구려 고분군과 삼연 문화의 무덤 유물 비교. 고구려는 부여의 성격이 매우 짙고
삼연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4세기 중엽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고국원왕부터 소수림왕,고국양왕까지의 고구려 고분군에서
'삼연 문화(三燕 文化:3개의 연 즉 전연,후연,북연)' 즉 전연의 문화가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증거유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전연 계통의 장식구,마구류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고구려 고분군단계(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르면 마구류,장신구에서 삼연문화의 영향이
더욱 더 커진다. )




이런 고고학적 증거는 삼연 문화(三燕 文化)의 많은 영향이 고구려 사회에 미쳤고 왕실의 장신구,군사 마구류,갑옷에
삼연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 광개토의 외가나 친가가 모용씨였고 그래서 광개토태왕비에 연나라를 까는 내용을 거의 넣을수없던 것이다.
모용보는 고구려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 모용씨 세력이 들어섰으므로 고구려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비에는 광개토태왕을 추모,유리,대무신왕의 후손으로 기록해놓고 대무신왕 이후
계루부 고씨 혈통 임금들은 하나도 안 기록해놓고 고구려 왕실 고씨(계루부)의 시조이자
고구려에서 최초로 중앙집권을 이루고 한나라와 여러 차례 싸워 요동,현도 두 군현을 활활 태워버린 태조왕은
언급도 되지 않는다. 추모,유리,대무신왕은 계루부와는 반대되는 비류부(소노부) 혈통이다.

이점으로 보아 광개토태왕은 선비족의 피가 많이 섞였었던 것 같다.



(태왕릉(고국원왕의 무덤 혹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제 날개장식. 고구려 투구에 붙여지는 장식이다.
이런 식의 금제 장식 자체가 선비족으로부터 온 문화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4~5세기 고구려 무사)



다음편 2편에는 광개토태왕의 충격적인 이름의 비밀을 발표하겠다.







핑백

  • 제준생제홍 제홍생백민帝俊生帝鴻帝鴻生白民 :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아틸라였다. 2012-05-20 16:44:01 #

    ... 다 정리하여 글로 올리는 바이다. 지금부터 연구해놓은 증거들을 차곡 차곡 제시하겠다. 이전 글에서 난 광개토태왕이 선비족 출신 왕자임을 고증하였다. http://ragwangfal.egloos.com/1687426 이번에는 광개토태왕의 이름에 대해 고증할 차례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이상하게도 광개토의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광개토의 ... more

덧글

  • 엿갤 2012/05/19 15:39 # 삭제 답글

    신선한 글 잘 읽고 갑니다 근데 음악이 쉿이군요. 아무튼 청림본자 만세!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만세!!!!!!!!!!!!!!!! 감사합니다!
  • 럴럴럴 2012/05/19 16:41 # 삭제 답글

    아이고 웃긴다.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온갖 사람들이 비웃는 것도 모르고 이런 망상글을 써놓고 자기딴에는 만족해서 히죽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끼룩 2012/05/19 17:38 # 삭제

    풍큐는 뭐먹고살까요?
    관심먹고살지요 ㅎㅅㅎ
  • 끼룩 2012/05/19 17:40 # 삭제

    풍큐는 정신분열증으로 '강제'입원된 전력이 있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난치병이죠
    풍큐 깔려고 정신분열 환자라고 매도하는게아니라
    1, 풍큐가 실제로 정신분열증 환자인건 사실이고
    2. 정신분열증 환자는 이성적인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건 과학적으로 사실이구열
    그러니까 결론=관심도주지말고 상대도해주지말쟈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뭐가 웃겨. 말이 되는데.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난 정신병자아니고 정신분열증 입원 전력도 없음. 유언비어 날조 그만 ㅋ
  • 끼룩 2012/05/20 17:36 # 삭제

    가족이 프리메이슨에의해 안면교체됬다고 믿어서 너희어머님 칼로 찌르려다가 제지당하고 정신병원 강제입원됬잖아?
    반박못하면 닥쳐라.
  • 앜ㅋ 2012/05/20 17:37 # 삭제

    ㄴ 풍큐를 까면서도 풍후의 정신승리 패턴을 이용해서 풍자까지 하시는군녀
    천재닼ㅋㅋㅋ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7:54 #

    ? 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난 그런거모르네. 허허허허
  • -3- 2012/05/19 17:39 # 삭제 답글

    광팔이 맨붕하는거 눈에 선하다 ㅋㅋㅋㅋ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
  • 뿡큐 2012/05/19 20:31 # 삭제 답글

    백제 고이왕은 삼국지 촉나라의 제갈공명이고,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한 원숭이이고, 환웅은 다름아닌 중국의 황제헌원이고, 외계인때문에 인류문명이 발달 안됐고, 칭기스칸은 일본인이고 이제는 광개토왕은 선비족이냐?
    정말 너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이럴 수는 없을텐데.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다 사실인걸 왜 부정하는가?
  • a 2012/05/19 23:44 # 삭제 답글

    근거가 뭔가 하고 봤더니 남당유고 ㅋㅋㅋㅋ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4 #

    1. 근거가 남당유고만있는게아님.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5 #

    2. 남당유고가 가짜란 정확한 근거도 없음. 그리고 남당유고의 위의 기록이 고고학적 증거하고 연결됨.
  • asd 2012/05/20 01:42 # 삭제 답글

    이건 뭐 지 유리한쪽으로만 쫙쫙 뽑아서 쓰니..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6 #

    그렇게보고싶으니 그렇게보이는거겠지. 바로 너가 말이야.
  • 냠냠이 2012/05/20 13:35 # 삭제 답글

    계속 보아온 사람으로서

    최근의 글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저번처럼 홍산문명에 대해서 글써주시면 좋겟습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6:56 #

    실망스럽다는건 주관적이신겁니다. 전 객관적 사실만 씁니다.
  • 초딩제홍 2012/05/20 17:02 # 삭제

    제홍아..넌 진짜 맛이갔구나
    실망스럽다고 자기의견 표현한거에
    '그건 주관적인 말입니다.' 라고 드맆치는건 대체 뭐니?
    당연히 주관적인말이지 ^^;.. 객관적으로 니 글이 실망스럽다는걸 증명하려고 한 말이 아니잖아.
    그냥 자기의견 표현한거지 ^^
    난독증인거냐?아니면 사고력이 딸려? 아니면 미친거냐? ;;
    너보면 진짜 답이없다..
  • 제홍씨帝鴻氏 2012/05/20 17:05 #

    실망스럽다는 말이 주관적이라는건 일단 내 개인 판단이고 불만이면 반박을 하면 될 일. 성낼거없음. 허허허
  • 정신과의 2012/05/21 15:32 # 삭제 답글

    님을 은평시립정신병원에 입원 권해드립니다. ..그래서 정신 감정 받고나서 치료한 다음에 님이 쓴글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제대로된 글이다라고 느낀다면 ....제대로 된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때까지 입원을 권유합니다...에혀 ,,불쌍한 인간
  • 어이가없다 2012/06/05 16:34 # 삭제 답글

    무슨 말도 안되는 구라를 실제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네
    그런 기록이 어디나오는데 언제 누가 쓴기록을 가지고 그러는거임

    전연이 망하고 후연이 세워지는게 단지 모용수가 전연의 모용황 자식이어서 국호를 계승한거 아닙니까?
    엄연히 망해서 없어진 나라를 다시 세운거 잖음

    또한 광개토 태왕이 백제를 공격할시에 후연이 뒤를 봐주었다?

    후연은 북위와 싸우다가 모용수도 그와중에 뒤지고 모용보가 즉위해서도 북위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


    고구려 왕실은 그냥 호구인가
    그리고 이련의 나이가 정말 전연이 침입해서 왕비 납치된 그 시대이긴 한건가?



    년대가 궁금해서 한번 찾아보니까
    미상∼391년. 고구려 제18대왕. 재위 384∼391년. 이름은 이련(伊連)‧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



    여러가지로 어이가 상실

    그런데 어디 보니까 유비가 촉의 황제여서 근초고(촉)왕 이라함 ㅋㅋㅋㅋ


    설마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건가??
  • 제홍씨帝鴻氏 2012/06/05 16:35 #

    난 유비가 근초고왕이라 주장한적없고 초고왕이라고 주장했음. 초고(촉)왕
  • 제홍씨帝鴻氏 2012/06/05 16:36 #

    고고학적,역사기록적으로 고구려가 삼연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건 사실. 광개토를 후연이 지원해줬던 것도 사실.
    부정해봤자 소용업다.
  • 어이 2012/06/05 17:00 # 삭제 답글

    선조들이 제홍이를 뭐라 생각할까 나야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광개토 태왕 검색하면서 알게된걸로 쓰는데도이렇게 말도 안되는데
    역사공부한 사람들이 이걸보면 진짜 광분하겠다. ㅋㅋ
    후연이 지원해줘서 광개토의 역습으로 숙군성까지 내줍니까
    관심종자인가 상대를 말아야
  • 제홍씨帝鴻氏 2012/06/05 18:47 #

    모용성,모용희 때 정책이 변해서 고구려에 적대적으로 후연의 정책이 변경된걸가지고 그 전까지 부정하는 논리는 그야말로 바보논리. ㅇㅋ?
  • 어의 2012/06/05 20:11 # 삭제 답글

    고구려 문화야 이곳저곳에서 받아들인게 있는거고 
    그게 그래서임 ?이호구 ^^
    주장하는 근거란것들이 죄다 엉터리에
    연관짓는 논리는 가관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뭘까?..
    유비는 연오랑이란 고구려 왕자요 제갈양이 백제 고이왕? 
    이런것들만 한두가지가 아니군
  • 제홍씨帝鴻氏 2012/06/07 00:56 #

    단순한 문화전파라고 볼수없다고 이미 말했을터인데?
  • 랑케 2012/06/07 23:01 # 삭제 답글

    요즘 블로그에 댓글이 한참 흥할때만큼 안달려서 속상한가?껄껄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01:31 #

    속상하지않네 껄껄 요즘은 관심사가 종말론으로 향하고있으이 껄껄
  • 어이 2012/06/08 00:29 # 삭제 답글

    어떤의미에서 단순한 문화전파가 아닌지?
    전쟁을자주하다보면 적의 병기들에 대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나는 흔히 철갑기병은 고구려가 최초라는
    글을 볼수있었는데 이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찰갑은 고구려 백제 신라 다 마찬가지고
    우리민족대대로 찰갑으로알고있는데
    그게 모두 연으로부터인가

    그리고 왜 출토물의 유사점을 그래서라
    귀결짓는지 자세히 좀 설명을 해보시게나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01:31 #

    난 단순히 유물에서만 비교하지않고 기록과 당시 정황으로 분명 고구려가 전연에 복속되고 그후 후연에도 복속되었고 요동도 후연으로부터 양도받은 것임을 이미 글에 적어놓았네.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01:32 #

    그리고 전연 후연이 미쳤다고 적국에 자기 기술을 유출시키겠는가? 그렇게 쉽게 유출되는 것도 분명 서로 관계가 호전되고 누군가가 종속관계가 되고 믿을만한 사이가 되야 어느정도 가능하게되는거지.
  • 어이 2012/06/08 02:19 # 삭제 답글

    그게 얼마나복잡한 기술이라고
    보고 연구하면 되는거지
    그게 습득한게아니고 전수해준거가 되는것인지

    그리고 후연이 미쳤다고 요동을 준다?
    그런기록이 어디있는데


    그럼 이제 고담덕이 선비족이란 근거를
    제시하게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6 #

    1. 그게 얼마나복잡한 기술이라고
    보고 연구하면 되는거지
    그게 습득한게아니고 전수해준거가 되는것인지 => 병신소리 아닥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6 #

    2. 모용수가 죽자 아들인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대방(帶方) 2국의 왕으로 봉하였으며,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요동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後略有遼東郡)." - 양서(梁書)』권54 고구려전과 『북사(北史)』권94 고려전(高麗傳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7 #

    3.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이련이 이 당시 모용씨에게로 인질로 끌려갓엇다가
    후에 풀려낫다는 내용과 모용씨에게로 끌려간 왕비의 소생이 이련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帝:고국양왕)는 이름이 이련, 또는 어지지이고 수림의 동복 아우이다. 해 태후가 꿈에 용산龍山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으로 추정)이 해 태후의
    승은을 입고나서 생겼다. 이에 점을 보는 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더니
    주 태후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이련)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모용황 도적의 난리 중에 제(帝:고국양왕)는
    해 태후를 따라서 연燕으로 끌려 갔었다. 모용황은 해 태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帝는 높이 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나라>의 다른 사람들은 모용황에게
    제(帝: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으나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어찌하려다보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
    라 말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보냈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봄 정원에 해씨가 왕자 이련을 낳았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비록 모용황의 침입 이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해에 모용황의 침입,환도성 함락,5만 포로사로잡힘 사건이
    있었는지라 해태후가 모용황에게 끌려가 강간당하고 이련을 낳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관들이 거짓을 기록하여
    왕실의 수치를 가렸을 수 있다.)

    "서기 342년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주 태후를 포로로 사로잡은 후) 주 태후의 조서로써
    아군과 백성들이
    막아서지못하게 하였다. 상 또한 잡혀 있는 모친이신 주 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도 없었고 이리하여 적들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갔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7 #

    4. 광개토태왕비는 후연과의 전쟁은 단 한 차례빼고는 전혀 기록하지않고있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명백한 기술의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8 #

    광개토태왕 시기 고구려는 장신구류,마구류,중장기병 문화에서 삼연문화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삼연의 군사적 제재를 받지않고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
  • 어이 2012/06/08 02:53 # 삭제 답글

    고고학적 근거란것은 애당초 말이안되는 것이다
    정황도 그렇다
    정황이라면 북사양서? 책봉 하는형식이라는거
    그럼 상국이면 하국은 왕족을 상국왕족으로 갈아야겠네
    온전히 상국인건지도 그렇지만

    비문의 내용에의거하면 요동을하사받은것이다???

    백제를 칠때 후연에서 쳐들어와 전쟁한 기록이 없다이거 겠네 
    이게 어떻게 그 주장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지
  • 제홍씨帝鴻氏 2012/06/08 21:48 #

    위 답변 참고.
  • 어이 2012/06/09 17:01 # 삭제 답글

    1. 남당유고 예기를 하는데 그것의 출처가 무엇인가?
    난 역사를 따로 베우지 않아서 잘 모른다만
    찾아보니 일본의 궁내성에 도서관이라한다.

    왜 거기있는책이 정작 우리나라엔 없는걸까?
    당시 일본은 내선일체를 위해 왜곡을 하려한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그 원본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런것을 검증없이 받아들여야한다면
    역사는 역사가 아닌 것이다.
    그저 허구인것이다.
    쓰는 사람 마음대로인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남당 유고의 내용을 보면 이련은 모용황이 해태후? 승은을 입었다(포로로 대려와 동침한것으로 봐야할것 같다)하고 나서 생겨
    진위의 논란이 일었다는 내용이 된다고 볼 수 있을것 같다.


    서두에는 이련은 수림의 동복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동족이라는 예긴데
    이후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이련은 모용황의 자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복은 동복인데 아버지가 다를 수 있단 예기가 되지 않은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상당히 완곡하게 돌려 표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두에 동복이라 하여 혈족임을 나타내고
    후에 동복은 동복인데 모용황의 자녀일 수 있다는 예기가 되는 것이고 (애매하게 표현)
    바로 뒤에는 이련이 모용황 침입때 해태후와 함께 끌려갔다는 내용?!?
    그리고 후에는 묘용황이 범상치 않게 여기는 말을 하고, 신하들은 죽이자 하고 모용황은 그러지 않고 살려 준다는 내용
    ...

    이런 것은 해석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쓸거면 분명하게 써야지
    너무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실은 이런일이 있었고 이랬는데 이러해서 왕이된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완곡한 표현으로 일단 가리고 기존역사에 편승해 가면서
    정작 목적하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자체가 사실상은 말도안되는 것이다.
    왕실이 생각이란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생각이란건 조금도 없더라도 그냥 본능적으로라도

    그런 상황이라 할때 이런 결과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2. 또한 광개토비문에 후연과의 전쟁이 한차례 적혀있다고 하는데

    그럼 백제외에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몇차례인지를 묻고싶고

    백제와의 전쟁은 몇 차례인지 묻고싶다.

    후연과는 쓸데없는 전쟁을 피하고 최대한 집약해서

    효과적으로 기회를 타서 한방에 밀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처음 즉위년조에 관미성 함락시킨것과
    차례로 우위를 점하고
    한강선까지 밀었다는거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백제와의 전쟁은 고구려로서 그만한 명분도 있었던 것이고
    당시 고구려로서 안정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리적으로도 후연과 싸워 진군힌다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것이다.

    북의 전쟁을 막고 백제왕 진사가 있을때 또는 왕이 나이어린 아신으로 교체 되었을때
    기선을 잡고 이남 전선을 안정화하고
    백제를 잡아 두는 것이 지당한 선택이지
    멍청하게 이리저리 치고 받고 싸우다가는 사상자만 많아지고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후연과의 전쟁은 일단 피하고 보는것이 상책이었을 상황이란 것이다.


    후연의 침공을 방어한 후, 후연의 약화된 시점에 쳐서 들어가는것이 이상한가?

    당연하지 않은가?



    글쓴이(제홍)말은 그 외에도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은 상당한 모순점들이 있다.


  • 노래좀 꺼라 2013/12/20 21:18 # 삭제 답글

    노래는 왜 자동재생 해둔거야
  • ㅋㅋ 2015/09/15 00:22 # 삭제 답글

    아이고 소설을 쓰냐 ㅋㅋㅋ 장난하나 대가리에 똥만 들었나 니 애미한테 역사 공부좀 하고 오렴
  • ㅋㅋ 2015/09/15 00:22 # 삭제 답글

    아이고 소설을 쓰냐 ㅋㅋㅋ 장난하나 대가리에 똥만 들었나 니 애미한테 역사 공부좀 하고 오렴
  • 애신각라 2018/10/04 18:10 # 삭제 답글

    광개토태왕은 신라의 태왕일 가능성이 있는것 같네요 고구려 몽골설 등장했습니다 만주는 신라의 고토이고 고려시대 바로 이전까지 우리나라 이름이 신라입니다 경북 경주 신라 왕족 무덤에서 광개토 제사용 그릇이 발견됨 비문에 고구려라는 단어 없습니다 경주 김씨 족보에 자신들의 선조를 태왕으로 기록했습니다
  • 새로운 2019/05/25 22:37 # 삭제 답글

    일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ㅡ^
  • 장독대 2019/05/26 12:07 # 삭제 답글

    중국사에 편입된 선비족이 원래 단군의 후예였으니 ^ㅡ^ 역시
  • 광개토 2019/07/16 21:49 # 삭제 답글

    아둔한자를 일깨우려 한글귀 써주마, 모용이란 말은 중국말로 보요라 읽는다 그래서 보요관(걸으면 흔들리는 관)이라 하는데 이것은 곳 부여이다-송동건 저, 고구려와 흉노, 부여가 금제 유물을 선호하고 일칙부터 사용하고 있었음을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영했다. 저 시기의 부여는 곧 백제이다, 그리고 고구려를 쳐들어가서 왕궁을 불태우고 미천왕의 묘를 파해친것은 모용황으로 표현된 근초고왕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저랬든 어쨌든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고구려 백제의 광활했던 영토 사진이나 쳐봐라 http://cafe.daum.net/liveuro/9LuJ/76957?q=%B0%ED%B1%B8%B7%C1&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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