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탕개 난 당시 율곡이이의 신묘한 징병묘술에 대해 ... by 청림도사책사풍후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계갑일록 율곡전서 행장을 합쳐보면
율곡전서 행장,계갑일록에 따르면 

니탕개 난 때 워낙 급박해서 1583년 2월 서울 도성 시정의 한량인용사 8천이 군관 80을 따라 먼저 출병한다.
그 8천의 출병 모습은 어땠을까?
그 8천의 말을 개인노비종자가 잡고가고 한량인(시정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한 사람 당 보인이 3명씩
주어져서 
짐말 짐당나귀를 잡고 가는 짐꾼동행보인 2명 (서울 시정방리인)
집에 남아 말을 바치거나 면포를 짜서 한량인에게 바쳐서 면제받아 남는 예비대 보인 1명 (서울 시정방리인)
이렇게 되었으리라. 계갑일록을 보면 시정의 활 잘 쏘는 한량인에게 보인을 주는 방식이 그랬음을 알수있다. 


그러면 한성부엔 5만만이 남는다. 
이것은 면포를 바쳐 남는 시정노인장애인병약자잔약자 7~8000(징비록에 근거) 
전투말을 가지고있는 활 못 쏘는 시정사람 1만~8000 
서울 각 사(각 관청) 노비 37000(시무차자의 기록에 근거) 


그 후 니탕개 난이 더 심각해지자 5월 13일 병조판서 율곡이이 주도로 
경중京中 즉 서울에서 잡색 출신들(민방위)로
서울 경중京中사수射手 1만(전투말 보유한 활 못 쏘는 시정인 , 궁궐의 경비를 대신 서는 사환역군 2000)을 뽑았는데 


당시 율곡이이는 나라에 전투말이 부족함을 항상 염려했다.
이때 서울 시정에선 활을 당길수있는 사람을 뽑는 그 시대 방식의 징병검사가 열리고있었다.
사람들은 떨고있었다.
징병검사를 받을 자들로 사수 1만이 뽑혔다.
율곡이이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아항! 전투말의 숫자를 넉넉히 채우기위해 '전투말을 바치면 활 쏘기 징병검사를 면제시켜준다'라고 포고하면
되겠구먼"
그러자 전투말을 바치고자하는 인간들이 구름처럼 우루루 모여들었다.
전투말을 받고 활쏘기 징병검사를 면제시켜주었다.
사람들이 얼씨구나 우리 율곡대감~~~ 하면서 춤을 췄다.

율곡이이는 궁술의 등급을 상 중 하로 나누어 잘 쏘는 자들 상급 200명을 뽑았다. 

율곡이이는 명령하길 
-장교를 잡류 중에서 200명을 뽑고(200명이 인솔하는 병력은 한 명 당 100명이면 2만) 
활을 쏘지못하는 백성들(1만)은 전투말을 갖추고있으니 각각 결채하는 노비로 보인을 주어
장교를 먼저 보내고 백성 노비 부대는 그 다음으로 보내라- 하였다.
활을 쏘지못하지만 전투말을 갖춘 부유한 시정방민남자들이 무려 1만명이나 되고 그들은 전투말을 
8천마리 정도 갖추고있던 주인들로 보이고
그들을 전투말 운송부대로 삼고 그들에게 보인으로 결채하는 노비(서울 각사 노비 37000 중에서 뽑았을것 )들을 보인으로 붙여주어
(8000 곱하기 2? 8000 곱하기 3?) ... 보인 즉 동행하며 따라가는 보호자들로 붙여주어 
먼저 간 장교 부대를 뒤따라 출발하게했다.

이렇게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징출하는데에 법도가 없게 행동해서 서울 시내가 쓸쓸해졌다.(텅텅 빔)


6월 11~12일 이제는 향도들로 하여금 서울 각 방의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다하면서
면포 5~6필을 내면 활 쏘는 징병검사에서 면제시켜준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너무 심하다싶었는지 서울에선 그냥 활 잘 쏘는 사람을 200만 뽑고 방민 중에서 활 쏘는 사람을 뽑는 제도를 파했다.
(이때 각 도들에서도 200씩 뽑으면서 면포를 무진장 뜯어냄 그렇게하여 서울과 각 도의 정예사수가 2000이 됨.
그리하여 국내가 소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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