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당시 한성부 민방위(잡색군) 8만명 (정군 보인 여정 다 합쳐서) by 청림도사책사풍후


조선 서울 남자민방위(잡색군) 숫자 .....,


한성부 남자를 3정丁(3명의 남자 장정)을 한 호戶로 삼아 잡색군으로 삼았더니 7만 6천명(거의 8만 호수戶首)을 잡색군 인원으로 삼아 그것을 부오로 나누어서 정군 보인 여정으로 편제했다.  - 세조실록

세종 당시 한 호의 평균 인구수가 5명 씩이다. (3명 남자 , 2명 여자)
중종 당시 한 호의 평균 인구수가 5명 씩 (3명 남자   ,  2명 여자)
서울은 워낙 사람들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니 남자 3명이 기본인건 당연.

선조 당시 한성부 평시 호수가 8만 호戶 -연려실기술 


남자는 정丁(남자 scv)이라 하고 늙어 뒤질때까지 정丁이라 불렸다. 안죽고 살아있는 좀비남자나 당상관이나 홀아비나 노약병자는 정丁에서 풀려났다.
3정을 한 호란 압축파일로 묶고 그 압축파일에서 한 명을 호수戶首로 뽑아 정규병력 '제색' 혹은 민방위 '잡색'으로 삼는다.
나머지 2명은 여정(예비인원)으로 둔다.  제색으로 뽑히는 농민의 경우엔 여정이 될 여지를 전혀 두지않는다. (제색병력 35만  , 잡색병력 40~50만  + 잡색의 여정 80만~120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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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24만 남자에서 8만 호수를 뽑으면 8만 호수를 잡색군 인원으로 삼아 부오로 나누어  3으로 나눈 숫자만 군사로 삼고 나머지 남은 자들은 군수품 메고가는 보인종자로 
삼는식으로 편제를 완료한다.



↓ 세조실록 양성지 상소
-신이 그윽이 보건대, 군사는 정예(精銳)한 것이 귀(貴)하지, 많은 것은 귀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역대(歷代)의 제도를 고찰하건대, 
농민의 인구가 30만이면  民口三十萬,  
호수(戶數)가 10만이고, 호수가 10만이면 군사는 3, 4만으로 則兵三四萬,  
으레 3정(丁)을 1호(戶)로 하여 3호에서 한 군사를 양병(養兵)하였습니다.例以三丁爲一戶, 三戶養一兵-
..... 3정(丁)을 1보(保)로 하면, 1인(人)은 호수(戶首)가 되어 군사를 다스리고, 則一人爲戶首。 以之治兵, 
1인은 솔정(率丁)이 되어 농사를 다스리고, 一人爲率丁, 以之治農, 1인은 여정(餘丁)이 되어 평상시에는 부역(賦役)에 이바지하고 행군(行軍)할 때에는 치중(輜重)738) 을 가지게 되니, 平時則供賦役, 行軍則持輜重, 
  一人爲餘丁。 平時則供賦役, 行軍則持輜重,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개성부 성안의 민간 호수가 전조(前朝 고려) 때에는 12만 호였으나 서울을 옮긴 후로는 겨우 8천여 호였다 한다. 지금 서울인 한성부는 평시의 호수가 8만으로 개경(開京 개성)의 전성하던 시기에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임진왜란 때에 거의 다 사망하고 지금까지 20여년 동안에 수만 호를 차지 못하니 모여 살기가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지봉유설》-연려실기술 


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 7월 13일 신해 2번째기사 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병조에서 한성부에도 잡색군을 뽑을 것을 건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외방(外方)에는 제색 군사(諸色軍士) 외에 대소 한역인(大小閑役人) 및 제색 아전(諸色衙前)과 공사 천구(公私賤口)를 아울러 잡색군(雜色軍)이라 일컫고, 세 장정[丁]을 한 호(戶)로 삼아 징병(徵兵)할 때에 예(例)에 따라 징집하는데, 홀로 경중(京中)에 사는 사람은 잡색군을 정하지 아니하여 경중과 외방이 각각 다릅니다.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당상관(堂上官) 및 홀아비나 늙고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 전함(前銜) 8품 이하 대소 한량인(大小閑良人)과 제사(諸司)의 서리(胥吏)·복예(僕隷)·공장(工匠)과 공사 천구를 호적을 빙고(憑考)해서 죄다 쇄출(刷出)하게 하여, 세 장정을 한 호로 삼아 잡색군을 뽑아 정하되, 8월을 기한으로 하여 적(籍)을 만들어서 본조(本曹) 및 한성부(漢城府)에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9책 2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74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신분(身分)
○兵曹啓: "外方則諸色軍士外大小閑役人及諸邑衙前公私賤口竝稱雜色軍, 三丁爲一戶, 徵兵時隨例徵聚, 獨京中居人不定雜色軍, 中外各異。 請令漢城府除堂上官及鰥獨老疾人外, 前銜三品以下大小閑良人諸司胥吏僕隷工匠公私賤口, 憑考戶籍, 悉令刷出, 三丁爲一戶抄定雜色軍, 期以八月成籍, 藏于本曹及漢城府。" 從之。

【태백산사고본】 9책 2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74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신분(身分)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19일 갑신 1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서울에 잡색군 설치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니, 상정소 당상과 승지들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서울에 잡색군(雜色軍)108) 을 설치하고자 하여 한성부(漢城府) 관리(官吏)를 급히 불러서 호패 문적(號牌文籍)을 상고하여 경중(京中)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남정(男丁)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게 하고, 또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각각 영군(領軍)을 감당할 만한 자 약간 인 씩을 천거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6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註 108]잡색군(雜色軍) : 조선조 때 군대 편제의 하나. 품관(品官)·생원(生員)·진사(進士)·교생(校生)·향리(鄕吏) 등으로 조직되었는데, 평시에는 병역 의무가 없었으나 필요한 때에 대비하여 잡색군이라는 형식상의 군대에 편입되어 있었음.
○甲申/御忠順堂, 詳定所堂上及承旨等入侍。 上欲於京都置雜色軍, 急召漢城府官吏, 考號牌籍, 悉數京中公私賤男丁。 又令諸將, 各擧可堪領軍者若干人。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6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25일 경인 3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잡색군울 설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문적(文籍)을 모두 조사하여 경중(京中) 제사(諸司)의 서도(胥徒)·복례(僕隷)와 오부(五部)의 방리인(坊里人) 모두 7만 6천 36명을 (잡색군으로 뽑아) 부오(部伍 : 군진의 대오)로 나누어서 
제사(諸司)에 19려(旅)를 두고, 오부(五部)에 1백 30려를 두었는데, 2인을 정군(正軍)으로 삼고 3인을 여보(餘保)로 삼아 25인으로 대(隊)를 삼았으며, 대에는 정(正)이 있고, 5대를 여(旅)로 삼아, 여에는 수(帥)가 있고, 3려에 장(將) 1인을 두었으니, 장(將)이 무릇 40인이며, 장호(將號)를 이장(里將)이라 하고, 군호(軍號)를 잡색군(雜色軍)이라고 하여, 장(將)은 번(番)을 나누어 숙위(宿衛)하되, 매 20인씩 서로 교체하게 하고,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여 종 4품에 이르러서 천전(遷轉)하게 하며, 여(旅)·수(帥)·대(隊)·정(正)은 정병(正兵)의 예(例)에 따라 사일(仕日)을 상고해서 품계(品階)를 더해 주고, 종 5품의 영직(影職)115) 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그날로 이장(里將) 20인을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7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115]영직(影職) : 실제로 그 직무에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을 주던 벼슬. 또는 그러한 자리의 명목만을 가지는 일. 차함(借銜).
○悉籍京中諸司胥徒、僕隷及五部坊里人, 凡七萬六千三十六, 分部伍於諸司, 置十九旅, 於五部置一百三十旅。 二人爲正軍, 三人爲餘保, 二十五人爲隊。 隊有正, 五隊爲旅, 旅有帥, 三旅置一將, 將凡四十人。 將號里將, 軍號雜色軍。 將則分番宿衛, 每二十人相遞, 授西班職, 至從四品而遷。 旅、帥、隊、正則依正兵例, 考仕加階, 授從五品影職。 卽日授里將二十人。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7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선조 당시 한성부 민방위(잡색군) 8만명 (정군 보인 여정 다 합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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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한성부 남자 수

연려실기술 - 선조 당시 한성부 호수는 평시에 8만호戶. (인구 40만 그중 남자는 24만 그중 비상동원민방위로 뽑힌게 8만 남자)
:( 8만 호는 호수가 8만 , 가족남자 애 노인 혹은 이웃집 남자가 8만+8만 , 여자가 8만+8만  )

세조실록 - 한성부에서 관리 노인 홀아비 병든 자를 빼고 3명의 장정(남자 혹은 남정男丁) 중에서 호수戶首로 1명씩만 뽑아 잡색군으로 삼았는데 (三丁爲一戶抄定雜色軍.....
   從之。 請令漢城府除堂上官及鰥獨老疾人外, 前銜三品以下大小閑良人諸司胥吏僕隷工匠公私賤口, 憑考戶籍, 悉令刷出, 三丁爲一戶抄定雜色軍, 期以八月成籍, 藏于本曹及漢城府。 ) 
서울 각 관청의 서도와 복례와 한성 5부의 방리인을  
잡색군 '8만인'으로 삼아 부오로 나누어 정군 2부대를 만들고(16000~2만명) 나머지 6만명(2만 곱하기 3)은 보인 여정으로 편제하고 
16000~2만의 정군을 150~160 려로 편제하고 그중 서울 궁궐경비원 2천과 각 사(서울 각 관청)의 아전 4000을 지휘할 
장교 40인 리장 20인을 두다.

선조수정실록,징비록 - 이일 신립이 거의 대부분 징발해 데려가서 서울엔 병조에 소속된 상번농노 4500(상번와서 노비처럼 부려먹힘당함), 남은 서울 잡색군(민방위) 7천만 남음.  (이일 신립이 데려간게 다 합쳐 7만명이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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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당시 한성부 잡색군과 경비 인원 숫자 = 다 합쳐 10만 1000 

경京아전(조례) 4000 + 봉족 4000

서울 관청노비 3만명 + 선상노비 7천 (공천)

궁궐 경비원(상번도성 무사재관의 대립인 사환역군) 1450 + 상번와서 노비처럼 부려먹힘당하는 상번농민 4500

신립 직속 철기 500 + 개인노비 500명 + 보인종자 1000명

대大한량인 8000 + 개인노비 8000 (사천)

소小한량인 8000 + 그들이 소유한 전투말 8000마리

시정방리인(5부 방민) 24000명 (성인 8000 + 애 8000 + 홀아비 노약자 병약자 잔약자 8000 )


선조 당시 한성부 평시 잡색군(민방위) 수 = 8만명 (당상관 , 홀아비 , 노약자 병약자 잔약자까지 추가하면 8만9천명) 






조선 전기 인구 , 병력 

인구 400만 

농민 육지 연해 하호 5만+5만 , 농민 하호의 보인 여정 25만 , 여자농민 35만  
잡색한량시민남자 , 노비 40~50만과 가족 애,소년,노인  100만 

철기 500  보인종자 1천
북방갑기 5000  보인종자 1만
장교 2천   보인종자 4천
정병 8천  보인종자 16000
상번보기 5만  보인종자 10만
수군 5만  보인종자 15만
서울 잡색병력(민방위) 군,보,예비대 도합 8만
지방 잡색병력 수십만(대략 40만)

한성 군량창고 40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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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丁 [dīng] 발음듣기 新 HSK 6 다른 뜻(2건)
1.성년남자. 장정

네이버 한자사전 정丁
①십간(十干)의 넷째  ②사물(事物)의 등급(等級)을 매길 때나 차례(次例)에 있어서 제 4위 병 다음임  ③정방(丁方)  ④정시(丁時)  
⑤남정(男丁)  ⑥성(姓)의 하나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개성부 성안의 민간 호수가 전조(前朝 고려) 때에는 12만 호였으나 서울을 옮긴 후로는 겨우 8천여 호였다 한다. 지금 서울인 한성부는 평시의 호수가 8만으로 개경(開京 개성)의 전성하던 시기에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임진왜란 때에 거의 다 사망하고 지금까지 20여년 동안에 수만 호를 차지 못하니 모여 살기가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지봉유설》-연려실기술 


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 7월 13일 신해 2번째기사 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병조에서 한성부에도 잡색군을 뽑을 것을 건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외방(外方)에는 제색 군사(諸色軍士) 외에 대소 한역인(大小閑役人) 및 제색 아전(諸色衙前)과 공사 천구(公私賤口)를 아울러 잡색군(雜色軍)이라 일컫고, 세 장정[丁]을 한 호(戶)로 삼아 징병(徵兵)할 때에 예(例)에 따라 징집하는데, 홀로 경중(京中)에 사는 사람은 잡색군을 정하지 아니하여 경중과 외방이 각각 다릅니다.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당상관(堂上官) 및 홀아비나 늙고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 전함(前銜) 8품 이하 대소 한량인(大小閑良人)과 제사(諸司)의 서리(胥吏)·복예(僕隷)·공장(工匠)과 공사 천구를 호적을 빙고(憑考)해서 죄다 쇄출(刷出)하게 하여, 세 장정을 한 호로 삼아 잡색군을 뽑아 정하되, 8월을 기한으로 하여 적(籍)을 만들어서 본조(本曹) 및 한성부(漢城府)에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9책 2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74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신분(身分)
○兵曹啓: "外方則諸色軍士外大小閑役人及諸邑衙前公私賤口竝稱雜色軍, 三丁爲一戶, 徵兵時隨例徵聚, 獨京中居人不定雜色軍, 中外各異。 請令漢城府除堂上官及鰥獨老疾人外, 前銜三品以下大小閑良人諸司胥吏僕隷工匠公私賤口, 憑考戶籍, 悉令刷出, 三丁爲一戶抄定雜色軍, 期以八月成籍, 藏于本曹及漢城府。" 從之。

【태백산사고본】 9책 2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74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신분(身分)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9월 26일 갑오 1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경기에서 강무할 준비를 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임금이 장차 경기(京畿)에서 강무(講武)하려고, 강순(康純)을 좌상 대장(左廂大將)으로 삼고, 정식(鄭軾)을 우상 대장(右廂大將)으로 삼아, 먼저 진(陣)을 치고 기다리게 하였다. 또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에게 명하여 센 활을 당기는 사람 25명을 골라 거느리게 하고 명칭을 해청위(海靑衛)라 하고, 최적(崔適)에게는 방하(榜下)를 거느리게 하고 명칭을 등준위(登俊衛)라 하고는 모두 호종(扈從)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39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1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인사-임면(任免)
○甲午/上將講武于京畿, 以康純爲左廂大將, 鄭軾右廂大將, 先結陣以待。 又命寶城君 容, 擇率彎强者二十五人, 名曰海靑衛; 崔適率榜下, 名曰登俊衛, 竝扈從。

【태백산사고본】 14책 39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1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인사-임면(任免)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9월 27일 을미 1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강순과 정식에게 유시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또 강순(康純)과 정식(鄭軾)에게 유시(諭示)하여 경중(京中)의 방리군(坊里軍)·잡색군(雜色軍)은 놓아 보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그대로 진(陣)을 치고 있다가 28일에는 모화관(慕華館)앞에서 진(陣)을 옮기고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국편영인본】 14책 39권 41장 A면【태백산사고본】 8책 41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乙未/又諭康純、鄭軾, 放遣京中坊里雜色軍, 其餘軍仍陣。 二十八日, 於慕華館前, 移陣待令。

【국편영인본】 14책 39권 41장 A면【태백산사고본】 8책 41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19일 갑신 1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서울에 잡색군 설치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니, 상정소 당상과 승지들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서울에 잡색군(雜色軍)108) 을 설치하고자 하여 한성부(漢城府) 관리(官吏)를 급히 불러서 호패 문적(號牌文籍)을 상고하여 경중(京中)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남정(男丁)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게 하고, 또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각각 영군(領軍)을 감당할 만한 자 약간 인 씩을 천거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6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註 108]잡색군(雜色軍) : 조선조 때 군대 편제의 하나. 품관(品官)·생원(生員)·진사(進士)·교생(校生)·향리(鄕吏) 등으로 조직되었는데, 평시에는 병역 의무가 없었으나 필요한 때에 대비하여 잡색군이라는 형식상의 군대에 편입되어 있었음.
○甲申/御忠順堂, 詳定所堂上及承旨等入侍。 上欲於京都置雜色軍, 急召漢城府官吏, 考號牌籍, 悉數京中公私賤男丁。 又令諸將, 各擧可堪領軍者若干人。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6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25일 경인 3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잡색군울 설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문적(文籍)을 모두 조사하여 경중(京中) 제사(諸司)의 서도(胥徒)·복례(僕隷)와 오부(五部)의 방리인(坊里人) 모두 7만 6천 36명을 (잡색군으로 뽑아) 부오(部伍)로 나누어서 
제사(諸司)에 19려(旅)를 두고, 오부(五部)에 1백 30려를 두었는데, 2인을 정군(正軍)으로 삼고 3인을 여보(餘保)로 삼아 25인으로 대(隊)를 삼았으며, 대에는 정(正)이 있고, 5대를 여(旅)로 삼아, 여에는 수(帥)가 있고, 3려에 장(將) 1인을 두었으니, 장(將)이 무릇 40인이며, 장호(將號)를 이장(里將)이라 하고, 군호(軍號)를 잡색군(雜色軍)이라고 하여, 장(將)은 번(番)을 나누어 숙위(宿衛)하되, 매 20인씩 서로 교체하게 하고,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여 종 4품에 이르러서 천전(遷轉)하게 하며, 여(旅)·수(帥)·대(隊)·정(正)은 정병(正兵)의 예(例)에 따라 사일(仕日)을 상고해서 품계(品階)를 더해 주고, 종 5품의 영직(影職)115) 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그날로 이장(里將) 20인을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7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115]영직(影職) : 실제로 그 직무에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을 주던 벼슬. 또는 그러한 자리의 명목만을 가지는 일. 차함(借銜).
○悉籍京中諸司胥徒、僕隷及五部坊里人, 凡七萬六千三十六, 分部伍於諸司, 置十九旅, 於五部置一百三十旅。 二人爲正軍, 三人爲餘保, 二十五人爲隊。 隊有正, 五隊爲旅, 旅有帥, 三旅置一將, 將凡四十人。 將號里將, 軍號雜色軍。 將則分番宿衛, 每二十人相遞, 授西班職, 至從四品而遷。 旅、帥、隊、正則依正兵例, 考仕加階, 授從五品影職。 卽日授里將二十人。

【태백산사고본】 15책 4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7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성종실록》은 호패를 받은 자 중 실제로 국역을 담당할 양민은 1∼2할뿐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평시 인구수가 400~500만이니까 그중에서 국역을 담당할 양민은 꼴랑 40만 밖에 
안된다.  조선시대 전기 평시 호수가 80만인데 서울과 지방의 제색과 잡색을 전부 합친 것이다. 여기에 5명을 곱하면 400만이다. )

호패는 왕실 ·조관(朝官)으로부터 서민 ·공사천(公私賤)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정丁(16세 이상 남자를 정丁이라 한다.)만 받아 소지하였다.
정丁은 호패 문적 장부에 모두 적혔다.

서울과 서울 인근 즉 한성부엔 24만 남자가 살았지만 3명의 정丁(남성) 중 1명씩만 뽑아 호패 문적에 적었는데 도성 안의 남자들과 그 인근 얼마 안되어 사는 자들 다 합쳐 8만명만
호수戶首로 뽑아 잡색군(민방위)으로 삼아 한성부 호패 문적에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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