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공신도비 비문으로 보는 요서 창려 도하 땅의 '조선' 건국 (동대장자 문명) by 청림도사책사풍후

두로공신도비 비문으로 보는 요서 창려 도하 땅의 '조선' 건국 (동대장자 문명)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에는 "조선이 건국하고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라고 적혀있다.


심백강 교수는 사고전서에서 이 사료를 발견한 후 '산융=동호=선비족'의 땅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고조선이 최초로 건국되었다고 적혀 있다.”
라고 했다.


“두로 영은의 비문은 “조선이 요서 고죽 땅에서 건국했다.””라고 말하고있는 것이다. 
이는 요서 지방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기억하는 역사로 보인다.


동호 계통 오환족 선비족이 위나라의 용병으로 활동하며 중국의 동북 지역을 안정시키던 위나라 시대에 편찬된
[삼국지 위략]에도 조선 제후는 요동군 문 번한현의 서쪽 2천리에 걸쳐 영토가 있었고 조선의 자손들은 난폭 교만 잔인하여 
서주 시대 , 춘추시대 , 전국시대에 걸쳐 40여대 동안 연나라와 대결하다 2천리를 뺏기고 
요동으로 쫓기고 이후 요동에서도 격퇴당해 요동과 패수청천강 사이가 공백지가 되었다고 적고있다.
 
 
이 비문은 유신庾信이 쓴 유자산집庾子山集(권14)에 실려있는데 
정식 명칭은 「周隴右總管長
史贈太子少保豆盧公神道碑」이다. 현재 전하는 유자산집은 隋書, 唐書, 宋史
에 기록된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이른 것은 明代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사고전서에 수록된 유산자집도 명대 이후의 것을 수록한 것이다. 


두로공영은신도비문의 
‘조선건국朝鮮建國’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고조선이 선비족의 발상지인 시라무렌강유역에서 건
국되었다 ..... 
이 내용은 요서 대릉하 지방 창려 도하 땅의 선비족이 자신들의 조상을 고조선에서 유래한다고 인식한 것이다..........


비문을 인용해 보면, “군의 휘는 영은이요 자는 모이다 창려 도하 사람이다. 본 성은 모용이다. 
연 문명제 황의 후손이다. 
조선 미(기)자가 고죽에 책봉되었는데 백이의 나라이다.
한나라 때엔 4개의 성(낙랑성 현토성 진번성 임둔성)이었고 그 이전 진나라(진시황) 땐 한 제후(조선 제후)였다.
.... 조선이 건국하자 고죽을 임금으로 삼았다.君諱
永恩字某, 昌黎徒河人, 本姓慕容, 燕文明帝皝之後也. 朝鮮微(當作箕)子之封孤竹伯夷之
國, 漢有四城秦為一候 … 乃為銘曰 朝鮮建國, 孤竹為君"    라고 나온다.




당시 모용씨(모용선비)는 조조 위나라 , 사마씨 진나라 시대에 옥을 주렁주렁 달은 나뭇가지 금 은 보요관을 쓴 소년 기마무사들을 양성하던 [동북 지역 요서 지방 요동 지방 연나라 대 땅 상곡 지방에 걸쳐 활동하던 기마민족]으로 부여 포로 고구려 포로 우문부 포로 단부 포로 백제 포로 낙랑 잔민들을 요서 라마동고분 [잔병 세력]으로 묶어 그들을 앞세워
동북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전연 후연 북연 3개의 연 문화(삼연문화)를 세워 고구려의 성장을 돕고 백제 부여씨 정권의 성장 임나가라의 성장 야마토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모용선비족의 다른 이름은 '산융' '동호' '오환' '선비'로 '구려' 역시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비려'란 무리(요녕성 서풍시 서차구 목곽묘 고분)를 이루어 함께 활동하고 다녔다.
모용씨는 전하기를 자신들의 조상은 오제(삼황 이후 오제 시대) 시대의 유웅씨,제곡고신씨인데.
제곡고신씨가 바닷가 해변을 노닐다가 염월이란 작은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 작은 아들이 유웅씨(헌원 무리)와 어울리어 그 무리가 되었다.
'동호'가 되었는데.  요서 자몽땅 창려 극성에 살았다.


서주 시대 춘추 시대에는 하북 , 내몽고 홍산 , 요서 지방 대릉하에 무종 , 영지 , 고죽 , 산융 , 발 (박), 식신 도하 가 살았다.
은나라 말기에서 서주 초기 기자가 고죽인들을 데리고 연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요서 도하 땅의 고죽군의 아들 백이 숙제 무리들이 사는 땅에
정착했다 구덩이를 파고 오랑캐들의 기운을 제압하기위해 구덩이에 조상들의 청동예기를 파묻었다. 
기자는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 땅의 제후로 책봉받고 부임을 명받았으나 주나라의 제후가 되길 거절했다.
기자는 고죽군의 신하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했으나 고죽이 그 임금이 되었다.


춘추시대 기원전 7세기 제 환공이 연나라를 넘어 산융을 벌하고 고죽을 격파하고 영지를 잔파시키고 
요수(난하)를 넘어 도하마저 격파하려다 그냥 돌아간다.
이로서 산융 세력이 쇠잔된다.
그러자  도하 땅의 조선 제후에게 패권이 돌아갔다.
제 환공은 요동 너머 조선 땅의 발족 숙신족과 표범가죽을 거래했다.

춘추시대 말 ~ 전국시대 초 창려 도하 땅의 조선 제후는 동호족이지만 모계는 기자의 후손으로서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제후에서 왕을 칭하고
교만 포악 잔인한 조선 자손들을 데리고 연나라와 패권을 다투었다. 연나라로부터 귀족 진개를 인질로 받았다.
요동 험독에 만滿이란 별도의 동호족 왕을 두어 요동의 별개의 조선 땅을 다스리게하여
진번의 예맥 구려 오랑캐를 제도하게 했다.
진개는 연나라로 돌아가 복수하러 다시 돌아온다
진개는 내몽고의 동호를 격파해 1천리 내쫓고 
난하(요수) 동쪽 '먼 동쪽 땅'(요동 땅)을 넘어 조선을 격파해 
마침내 시라무렌하(거대한 요수) 서쪽의 조선 제후의 세력권 2천리를 먹고 장거리 원정이 드디어 끝난다.
서패수가 흐르는 요동군의 문, 번한 현까지 연나라 장성을 쌓고
요양 양평에 '시라무렌하 강물 요수의 동쪽 군현'(요동군) 양평현을 설치하고  하북 요서에도 조양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군을 착착착 설치한다. 
청천강패수(동패수)에는 연나라 목책들을 쌓고 그 사이에 연나라 사람들을 이주시켜 군사를 두고 관리를 두고 군현의 통치를 실시하였다. 
험독의 만왕은 패수청천강 남쪽으로 달아나  왕험성을 세우고 '낙랑'을 세웠다.

 

참고 : -동북아역사재단.동북아역사특위 학술회의집 2016 상고사 토론회 고조선과 연의 경계 만번한은 어디인가?- 
삼국지 위략 
모용선비 관련 여러 중국 고대 기록들
한서지리지 험독현 주석



전쟁 이전 하북지역과 요서지역의 물질문화와 그 담당자

위략魏略에는 전쟁 전에 조선 왕을 참람되이 칭한 조선 제후와 전국 연나라가 서로 ‘왕’을 칭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교류하였다고 하며, 
사기史記 흉노열전에는 전쟁 전에 진개를 인질로 파견하는 등 전
국 연이 동호(또는 호胡)와도 교류하였다고 되어 있다. 
두 사서에는 공통적으로 전국
중기(기원전 4세기 후반) 무렵 고조선 또는 동호가 전국연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
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전쟁 이전 고조선과 동호, 그리고 전국연의 상대적인 위치
를 비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선결요건이다. 
먼저 전국연은 북경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지만 역현 일대에 燕下都
(武陽城)를 건설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했던 것은 전국 중기 이후이다. 그 이전에
는 ‘易市’ 명문 토기 등이 출토되어 ‘臨易’ 또는 ‘易’일 가능성이 높은 용성 일대
4) 春成秀爾․今村峯雄 編, 2004, 彌生時代の實年代, 學生社. 小林靑樹 編集, 2016, 季刊 考古學135(東アヅアの靑銅
器と彌生文化), 雄山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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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촌-고현촌)가 거점으로 논의되며,5) 그 이후에는 燕上都(薊城)가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국연은 하북 북부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이 과정
에서 주목되는 것은 물질문화 확산 이후 단계에야 영역화가 진행되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전국연의 물질문화는 전국 초기(기원전 5세기 후반)의 경우 경진당 일
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전국 전기(기원전 4세기 전반)에야 연산산맥 일
대의 난하 중류까지 확산되나,6) 그 영역화는 전국 중기(기원전 4세기 후반) 이
후에야 진행된다. 이때 연산산맥 일대의 옥황묘문화는 전국연문화로 대체되며, 옥황묘, 호로구, 서량광 등의 관련 유적에서 토착 계통의 주축 동서방향 분묘들은 사라지고 전국
연계의 주축 남북방향 분묘들이 대거 조영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때에는 북방식
동검이 사라지고 전국연계 토기류가 대거 확산되어 부장유물 역시 전국연계 일
색으로 변모한다. 오도하자 등과 같은 일부 분묘에서 토착 유물들이 일부 보이
지만 늦더라도 전국 중기(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토착문화가 완전 사라지고 전
국연계 물질문화가 전면 확산되는 양상으로 보아 난하유역까지 전국연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조․연전쟁 이전 요서지역의 물질문화는 과거 산융이나 동호 같은 북방계
통 주민집단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고조선과 관련되는 토착집단으
로 보는 견해들이 증가하고 있다. 원래 요서지역의 물질문화를 동호와 관련시켜 본
것은 앞서 언급했던 사기 흉노열전의 5군 설치 기사 때문인데, 같은 흉노열전에서
그에 앞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동호는 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을 따름이다.7)
동호가 임호와 누번의 동쪽에 있으면서 함께 3胡로 불렸다는 것도 동호의 위치를 요
하 상류 방면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서지역 물질문화의 담당자를 동호로 인식했던 것은 과거 중
국이나 일본 학계의 조사․연구 전통에 기인한 바 크다. 이를테면 1930년대 일본인이
적봉 홍산후 유적(東亞考古學會 編 1938)을 조사한 후 이를 동호의 유적으로 지칭
한 이래로 1958년 영성 남산근 유적(李逸友 1959, 1964)과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
5) 배진영, 2010, 고대 북경과 연문화, 한국학술정보. 6) 滕銘予·張亮, 2011, 「玉皇廟文化的發現與硏究」, 北方文物2011-4.
7) 史記 卷110 匈奴列傳 第50, “而晋北有林胡․樓煩之戎, 燕北有東胡․山戎”.
동북아역사재단 65
(朱貴 1960)에서 특징적인 청동기군이 확인되자 중국 조사자는 각기 동호의 유적이
라 주장했다. 이후 적봉 하가점 유적(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內蒙古工作隊 1974)이 정
식으로 조사된 후 하가점상층문화로 불렸으며,8) 자료가 증가하자 현재의 십이대
영자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로 귀속시켜 이해하고 이를 동호의 담당문화라고 하
는 견해들이 대세를 이루었다.9) 더 나아가 일본학계는 남산근 유적과 십이대영
자 유적의 문화 성격이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하여 현재의 십이대영자문화로 구분
되는 요령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동호의 것이라고 했다.10) 십이대영자문화를
동호의 것이라고 하는 설은 현재에도 일본학계에서 가장 많이 지지받고 있다.11)
전쟁 이전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요하 하류 방면으로 보는 ‘평양중심설’의 경
우12) 대체로 이와 관련되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중국학계에서 하가점상층문화와 십이대영자문화의 이질적인 면이 부각되
고 난 후13) 여러 연구자에 의해 십이대영자문화의 독자성이 강조되어 독립된 고고
문화로 설정되었으며14) 1958~1965년 심양 정가와자 유적이 확인되고 난 후에는
요중지역도 함께 거론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는 국내학계에도
발전적․비판적으로 수용되어 하가점상층문화는 공병식동검과 삼족력을 표지유물로 하
여 기원전 11~7세기경 노로아호산 이북에서 유행했던 북방계 청동기문화이며, 십이
대영자문화는 요령식동검(또는 비파형동검)과 이중구연점토대토기를 표지유물 하여
기원전 9~4세기경 노로아호산 이남에서 요서지역과 요동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유행
했던 토착계 청동기문화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15) 이에 따라 최근에는 요서
지역의 물질문화는 십이대영자문화이며, 이를 예맥이나 고조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8) 劉觀民․徐光冀, 1981, 「內蒙古東部地區靑銅時代的兩種文化」, 內蒙古文物考古1981-1.
9) 靳楓毅, 1987, 「夏家店上層文化及其族屬問題」, 考古學報1987-2; 林幹, 1989, 東胡史, 內蒙古人民出版社. 10) 秋山進午, 1968․1969, 「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器文化の樣相-考古資料とくに靑銅短劍を中 心として-(上) /
(中)/(下)」, 考古學雜誌 53-4, 54-1, 54-4.
11) 宮本一夫, 2000, 「戰國燕の擴大」, 中國古代北疆史の考古學的硏究, 中國書店; 加藤謙一, 1998, 匈奴 「帝國」, 第
一書房. 12) 송호정, 2003,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13) 朱永剛, 1987, 「夏家店上層文化的初步硏究」, 考古學文化論集1, 文物出版社. 14) 朱永剛, 1997, 「大,小凌河流域含曲刃短劍遺存的考古學文化及相關問題」, 內蒙古文物考古文集2, 中國大百科全書出
版社; 劉國祥, 2000, 「夏家店上層文化靑銅器硏究」, 考古學報2000-4; 烏恩岳斯圖, 2007, 北方草原考古學文化硏
究, 科學出版社. 15) 오강원, 2004, 「中國 東北地域 세 靑銅短劍文化의 文化地形과 交涉關係」, 선사와 고대20; 이청규, 2008,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연구 성과」,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역사재단; 조진
선, 2010,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발전과정과 성격」,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동북아
역사재단; 천선행, 2010, 「비파형동검문화 성립 전후 요서지역 토기문화의 전개」,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문화,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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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로 보는 견해들이 증가하고 있다.16) 고고학계에서 제기되는 고조선 중심지 이
동설은 대체로 이와 관련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요서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동호의 위치와 물질문화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서요하 상류역을 중심으로 확인된 바 있는
북방계의 분묘 유적들이 주목된다. 임서 정구자 유적(王立新 外 2010), 오한기 철장
구 유적(邵國田 1992)과 수천 유적(郭治中 2000) 등의 정구자문화(또는 수천문화)
로 지칭되고 있는 이와 같은 유적들은 하가점상층문화를 파괴하고 조영됐다던지 전
국연계 물질문화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기원전 6~4세기로 편년되며, 동물순생이 일반적인 반면 농경 흔적은 거의 확인되지 않아 유목민적 성향이 강한
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주로 전국시대이며, 지역적으로는 하가점상층
문화 분포권과 비교되는 서요하유역이란 점을 고려할 때 정구자문화(유형)는 동호와
가장 관련성이 높은 문화라고 평가된다.17) ‘북아시아 몽골인종’이란 인골 감정 결과
가 선비․오환 계통 인골 감정 결과와 일치하는 점도 참고된다.18) 만약 요서지역의
물질문화 담당자가 동호라면, 전쟁이전 요서지역에는 북방 유목문화 요소들이 증가
해야 하나 오히려 그 반대로 거의 소멸하며, 요서지역 집단들이 전국연의 요서 진출
과정에서 서요하의 상류 방면으로 대거 이동하였다면 그 지역에는 십이대영자문화
요소들이 다수 확인되어야만 하나 그와 같은 증거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 李淸圭, 2005, 「靑銅器를 통해 본 고조선과 주변사회」, 北方史論叢6; 박준형, 2012, 「대릉하~서북한지역 비파형
동검문화의 변동과 고조선의 위치」, 한국고대사연구66; 吳江原, 2013,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북한 지역 물질
문화의 전개와 고조선」, 東洋學 53; 趙鎭先, 2014, 「中國 東北地域의 靑銅器文化와 古朝鮮의 位置 變動」, 東洋
學56; 이후석, 2015, 「기원전 4세기대 요서지역의 문화변동과 그 의미」, 인문학연구28,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
원. 17) 王立新, 2005, 「探東胡遺存的一介新線索」, 邊疆考古硏究3. 姜仁旭, 2009, 「內蒙古 동남부 시라무렌하 유역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목문화에 대한 이해」, 韓國靑銅器學報9.
18) 朱泓, 2006, 「東胡人種考」, 文物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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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1. 조․연전쟁 이전 고조선과 전국연의 물질문화 범위와 경계
이와 같이 요서지역의 물질문화와 그 담당자에 대해서는 과거 중국학계와 일본학
계를 중심으로 동호 등의 북방계 종족집단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국
내학계를 중심으로 고조선과 관련되는 주민집단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요서지역의 물질문화가 고조선과 얼마만큼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는 십이대영자
문화를 시기별․지역별로 따져 보아야만 하며, 또한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와도 관련되
는 문제이다.
2) 전쟁 이전 고조선과 전국연의 물질문화 범위와 경계
조․연전쟁 이전 기원전 4세기대의 십이대영자문화는 요서지역의 동대장자유형과 요
동지역의 정가와자유형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며, 각기 요서 남부지역의 건창 일대와
요중지역의 심양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하며 성장했다. 두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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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적석목관묘형 분묘, 요령식의 초기 세형동검, 점토대토기옹과 평저장경호 등이 함
께 확인되고 있어 문화적인 유사성이 상당부분 확인되나, 요서지역에는 다뉴경이 없
는 대신 건창 일대를 중심으로 중원계 무기류와 예기류가 부장되며, 요중지역에는
중원계 무기류와 예기류가 없는 대신 심양 일대를 중심으로 토착계 다뉴경이 부장되
고 있어 차이점도 적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대장자유형과 정가와자유형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문화적인 상사성
과 상이성이 일정하게 나타내는 것은 두 지역의 지배층이 서로 교류하면서도 권력기
반을 달리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동대장자유형의 수장층은 대외 교섭권을 장악하
고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정가와자유형의 수장층은 제의권을 행
사하며 주변 집단과의 유대 의식을 바탕으로 점차 권력을 강화시켜 나간 것으로 이
해된다.19) 이와 같은 문화 양상을 문헌사료와 접목했을 경우, 한때 전국연과 교류하
며 전쟁까지 불사하였다는 魏略의 기사에 집중하면 고조선은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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