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지도와 예맥의 기원 by 책사풍후미나모토





고조선이 요서에 있었느냐 요동에 있었느냐 평양에 있었느냐 


이 문제는 한국인의 오랜 관심사다


평양이나 요동은 고조선 시대 성벽도 안나오고 
고고학문화라고 해봤자
비파형동검 조금 나오고 팽이형 토기,미송리형 토기 , 탁자식 고인돌 이런거만 나온다.
탁자식 고인돌을 과연 왕릉 수준이라고 봐야할지도 애매하다.
그게 야만족추장이 원주민 때리면서 지은건지 왕이 지으라한건지 
단군이 전국 곳곳에 신사같은걸 세운건지 애매함.


요서에 있었느냐 요동에 있었느냐 평양에 있었느냐는 결국 갖다붙이기 나름이다.


고조선의 초기 역사는 국내 기록엔 그저 단군이 곰의 새끼라서 천년 넘게 살다가 중국인 기자한테 쳐맞고 산속으로 도망쳤다는
수준의 기록만 있어서 전혀 고조선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않는다.
고조선 왕이 기자의 후손이라는것도 중국 기록의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제후로 책봉되었지만 주나라 왕에게 고맙다는 인사 하나 없었다.'
'기자의 40여세대 이후인 조선 제후가 왕을 칭해...'라는 기록이라서 
기자가 조선의 제후로 임명되서 과연 세습을 했는지가 불확실하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증거로는 기자와 은나라 유민이 요서에 가서 정착해서 잠시 머물렀다 정도로 볼수있다.


고조선 연구는 단군,기자가 초점이 되어선 안된다.


고대 중국 기록 '삼국지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이란 문헌을 보면
고조선은 기원전 5세기 왕을 칭하며 연나라와 대립했다. 포악하고 교만한 엄청난 파워로 연나라 사람들은 위협을 느껴서
고조선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는 참다못해서 장수 진개를 보내 고조선의 영토 2천리를 따먹고 요동의 문현,번한현(안시성 근처)으로 국경선을
다시 그어서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지고 말았다. 조선은 중심지를 평양 왕검성으로 옮겼고 패수(청천강)가 조선의 북쪽 국경선이 되었다.
문,번한에서 패수 사이는 연나라 사람들이 와서 요새를 지어 수비했다. 
진나라가 와서 연나라를 먹고 문,번한~패수 사이에 만리장성의 동쪽 끝벽을 목책으로 상하 이중으로 쌓았다.(이를 '상하장'이라 한다.)


이를 통해 볼때 고조선은 연나라와 싸울만한 파워를 가지고있었고,
연나라와의 문화교류가 있었고, 요동의 서쪽에 2천리 영토를 가지고있었고 이 영토를 잃음으로서 조선은 쇠약해졌다.
고고학적으로 연나라 유물과 비파형동검이 함께 나오고 오랑캐의 땅이었던곳은 요서 하가점상층문화 '동대장자 유형'이라 볼수있다. 
그래서 이곳을 조선 왕이 있던 곳이라 볼수있다. 


요동,평양은 이에 맞는 조건이 없다. 진개의 침공 이전엔 연나라 유물이 잘 나오지않고, 
비파형동검도 요서에 비해 출토 빈도가 적다. 성벽 조차 없다. 강대한 국가가 있었다는 어떤 것도 없다. 




고대 중국 기록을 보면 기원전 7세기 제나라 환공이 요서를 칠때 요서 , 요동엔 산융 고죽 영지 도하 예맥 이란 나라가 있었다. 
또 산동반도와 이웃한 바다 건너엔 '발'이란 종족이 '조선'이란 땅에 거주하고 있었다.


비파형동검이 처음 나온 요서 하가점상층문화의 요서 대릉하 지역 유형 십이대영자 는 '도하'에 해당한다. 
십이대영자 이전엔 '위영자'라는 문화(기원전 10세기. 은나라 멸망 시기)가 있었는데 이 문화의 구덩이에서 다량의 은나라 청동용기들하고 '고죽' , '기후(기자 제후)'란 이름이 적힌 은나라 청동용기들이 나왔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기원전 6세기에 요동에 멀티 '정가와자'를 세웠다.
남은 십이대영자 주민들은 기원전 5세기 '동대장자'라는 유형으로 새롭게 바뀌는데.
연나라 유물을 많이 받아들이고 비파형동검도 계속 쓰면서 중국의 우수한 무기들을 많이 받아들인다. 
비파형동검을 개량해서 '세형동검'도 만든다.


삼국지동이전의 연나라와 싸우던 조선을 연상시킨다. 
 
문헌적으론 여기까지가 얻을수있는 증거다.


심백강이나 김종서,윤내현은 요서에 조선이 있었다느니 머니하면서 조선하니 구려하니 여러 증거들을 내놓지만 
그렇게 딱히 직접적인 증거는 나오지않는다.


다만 요서 하가점상층문화가 비파형동검을 만들었고 이 문화의 중심지는 항상 요서였고
요동,평양은 단지 멀티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하가점상층문화를 고조선이라고 본다면
요동,반도의 조선민족의 조상들('예'족)은 단지 하가점상층문화(몽골화된 중국인 융적 혹은 맥 , 선비족 , 숙신 계열 의 연합정권 이라고 본다.)의 
제재를 받던 변방의 힘 없는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하가점상층문화가 연나라에게 기원전 4세기 말에 망하자 연나라 백성이 되었다가
진나라에게 먹혀 진나라 백성이 된다. 
그 후 만리장성 공역에 동원되었다가 진나라 혼란기 때 탈출한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만리장성 공역에 동원되었던 진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 평양으로 가서 낙랑을 세웠다가 
경상도로 가서 진한을 세운다. 
외부에서 온 이주민이라서 마한의 간섭을 받았는데. 
삼국사기 신라 혁거세본기에는 '6촌을 세운 조선의 유민'이라고 나온다. 
고고학적으로 이들은 점토대토기, 세형동검을 쓰는 사람들이고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은 요서에서 나온 것이다. 






예족은 호랑이를 숭배하고 맥족은 일본서기에 '고마'로 나오는데 왠지 곰이란 한국발음과 유사하다.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에서 예족은 '부여인'으로 불려졌고, 맥족은 '고구려'라 불려졌는데 

둘다 같은 종족으로 '예맥'이라고 한다. 

예맥인들은 하백이란 중국신을 믿었다. 활 잘쏘는 동명이 알에서 태어나고 하백의 딸과 결혼한다는 신화는 

중국신화와 후예의 전설 , 은나라 난생신화 와 유사하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예맥족인 부여인은 어딘가에서 패망해서 온 패배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언제 만주에 왔는지는 기록으로 전해지지않는다.  

부여인은 은나라처럼 흰색을 숭상하고 은나라 달력을 쓰고 은나라인같은 중국식 예법이 몸에 완전 배여있다고한다. 

그래서 한대漢代 중국인들은 "역시 공자님 말씀처럼 중국이 예를 잃으면 오랑캐에서 중국의 예법을 찾게되는구나."라고 말했다. 

부여는 고대 중국 발음으로 '후이' 라고 한다. 이 후이를 한자로 적은게 '예 '이다. 

'맥'은 북방족을 뜻하는 중국 명사 다.  



예맥은 어느 시기, 중국에서 중국인들에게 패배해서 만주,한반도로 쫓겨온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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